인의예지 실천해 온 중국 상인사

■ 상인이야기
이화승 지음, 행성:B잎새 펴냄
신해혁명 전 중국 거상들… 유교적 '사농공상' 틀 속
온갖 규제·차별 받았지만 빈민구제·교육 등 힘쏟아
이재 넘어선 '상도' 정립

송나라 화가 장택단이 수도 카이펑의 모습을 담은 청명상하도 중 시장 풍경. 낙타를 타고 온 외국 상인들, 갓 쓰고 도포 입고 말 탄 고려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왼쪽아래)도 보인다. /사진제공= 행성비출판사


장사꾼이요, 장사치다. 국가 입장에서도 딱히 달가워할 이유가 없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종사하는 농업은 세금을 매기기도 편하고 이동도 적어 안정적인 세원으로서 국가 재정의 대부분을 담당했다. 하지만 수도 많지 않은 상인들은 장사 규모든 수익이든 속이기 편하고, 온 천지를 떠돌아다녀 관리도 안되고 외려 말썽만 일으키는 것으로 인식됐다.

나아가 위험부담은 있지만 이익이 농사에 비해 월등히 많은 상업으로 인력이 쏠리면, 안정적 수입원인 농민들이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도 크게 작용했다. 이는 관념적으로도 이어져 농민은 땅에서 정직하게 대가를 얻는 의로움(義)으로, 상인은 이익만을 따라가는 이(利)라는 대립구도가 형성된다. 예부터 많은 국가에서 농민들을 천하의 큰 근본이라고 치켜세우고, '사농공상(士農工商)'에서 상인을 가장 말석에 앉혀 온갖 규제와 차별로 묶어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만에서 중국 상인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화승 서울디지털대학교 중국학과 교수는 역사 속 여러 인물을 통해 조금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잘 알려진 고대 정치가들도 경제적인 인식을 갖추고 있었고, 나아가 상인들도 유가의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실천해 '이문(利文)'을 넘어선 길을 모색한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다.

이를 테면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유명한 관중의 경우가 그렇다. 그가 제나라 재상이 되자 정치개혁, 특히 상공업 발전에 큰 힘을 쏟았다. '보이지 않는 세금' 간접세와 소금ㆍ철에 대한 국가의 전매세, 전국의 상인을 끌어들이기 위한 인프라인 객잔 시스템을 강화했다. 그는 부유한 사람들이 돈을 써야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자리가 생긴다는 입장이었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궁핍해지면 대규모 궁궐 확장 공사를 통해 일자리를 늘리기도 했다

'사기'의 사마천도 그 대작의 말미에 '화식열전(貨殖列傳)'을 집어넣어 사농공상이 모두 중요함을 강조했다. 특히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상인들이 어떻게 사회에 공헌했는지 소개해, 당시의 '중농억상(重農抑商)' 풍조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실제 조선시대에는 '화식열전'에 대한 언급 자체를 금기시할 정도였다.

이 교수는 송나라 때에 드디어 전국적인 조직을 가진 상점과 신용거래가 등장하는 것에 주목한다. 사대부들이 상업에 종사하게 되면서 쓰임새(用)만을 중시하던 시장에, 사람 사이 믿음(信)을 중요시하는 유가사상이 더해져 '신용(信用)의 개념이 생겨났다는 분석이다. 나아가 원나라 때에는 잘 갖춰진 역참(驛站) 시스템과 이미 송대에 갖춰진 해양무역 인프라를 통해 더욱 경제가 활발해진다. 명대에는 환관 정화가 이끈 28년간의 대규모 선단 출항이 조선 기술 발달은 물론 동남아권으로 무역 범위를 넓혀줬다. 원거리 무역과 지역상인의 탄생도 이 시기 새로운 특성이었다.

이렇듯 상인들은 활동영역이 넓어지고 막대한 부를 쌓아가면서, 다른 한편론 유가적인 가치에 부합하는 근검ㆍ절약ㆍ수신ㆍ정직 등에도 눈을 돌렸다. 특히나 국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상인들의 역할이 컸다. 홍수나 가뭄 때는 빈민 구제에 나서고, 지역에 다리나 방파제를 만드는 토목사업, 서당 같은 복지분야에도 일상적으로 참여했다. 개중 공이 많은 상인들은 황제에게서 관직을 받고, 사회에서도 존경 받았다.

이 책은 신해혁명 전 19세기 후반까지의 역사를 상업 혹은 상인 중심으로 개관하고, 그저 이재에 눈이 어두운 장사치가 아닌 '상도'가 성립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다만 많은 역사 속 거상들을 소개하면서도, 새로운 상인에 대한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응집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점은 아쉽다. 1만8,000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