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영화」한편을 보자.
호주의 한적한 고속도로. 일단의 오토바이 폭주족들이 떼지어 달리며 굉음으로 위세를 과시한다. 그들 곁을 스포츠카를 가득 실은 승용차 운반차량이 지나간다. 예상대로 폭주족들이 달리는 차에 올라 스포츠카를 탈취한다.
얼핏봐도 세계 스포츠카의 대명사인 독일 한업체의 차다. 이를 본 경찰이 사이렌을 울리며 폭주족들의 뒤를 는다. 그러나 경찰은 운전대를 치며 추격을 포기한다. 경찰차로 이 스포츠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 바로 그때. 낙담하는 경찰 곁에 또 다른 스포츠카 운방차량이 등장한다.
현대자동차의 정통 스포츠카 「티뷰론」이다. 이번에는 경찰이 수송차량에 올라 티뷰론을 「탈취」한다. 그리고 범인들을 뒤 기 시작한다. 고속도로는 자동차 경주장으로 변한다. 고 기는 추격전. 고속도로와 일반도로를 넘나드는 가운데 폭주족들은 점차 좁혀지는 거리에 당혹해 한다. 대부분 티뷰론에 밀려 전복되거나 중도포기한다. 마지막 남은 한대. 그 역시 티뷰론의 돌진앞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순히 수갑을 받는다. 그런데 범인의 표정은 원망이나 후회가 아니라 「경탄」이다. 경찰에 끌려가면서도 티뷰론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는 폭주족의 모습이 경찰 헬기에서 클로즈업하는 것으로 이 「영화」는 끝난다.
지난 96년 3월 스위스 제네바모터쇼 팔렉스포(Palexpo) B홀. 400여명의 유럽기자와 자동차 관계자들이 홀은 가득매운 가운데 열린 현대 보도발표회에서 상영된 티뷰론 소개영화다. 왜 현대는 유럽의 심장부에서 자동차에 관한한 최고를 자부하는 독일인들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는 영화를 만들었을까.
두가지를 꼽을 수 있다. 자신감과 공격경영에 대한 의지다. 스포츠카는 아무나 만드는 차가 아니다. 현존하는 최첨단 기술의 종합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세계최고로 평가되는 스포츠카에 손색없는 기술을 갖추게 됐다는 뜻을 전세계에 선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현대는 더이상 값산차를 만드는 업체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티뷰론을 발표하면서 현대가 내건 구호(New Image Leader)에는 이런 의지가 잘 담겨있다.
주목되는 것은 이 행사가 정몽규(鄭夢奎)회장 취임(96년 1월)후 해외의 데뷔무대였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鄭회장은 『2000년대 세계 10대 자동차 메이커에 진입하겠다』는 「글로벌 톱-10」을 발표했다. 이에 앞서 鄭회장은 국내에서도 같은 계획을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다.
그로 부터 2년 7개월이 지난 지난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계동. 기아자동차 인수가 결정된 다음 날 鄭회장은 외신기자들의 요청에 따라 기자회견을 갖고 『기아·아시아자동차 인수를 위해 세계 10대 자동차 업체와 자본제휴를 모색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아 인수는 취임후 내건 목표(세계 10대업체)를 달성하는 결정적인 전기를 마련한 것. 이를위해 그는 세계 10대 업체들과 파트너 관계를 선언했다.
지난 25일. 현대는 보다 구체적인 구상을 발표했다. 기아·아시아 인수를 계기로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것이다. 현대는 내년에 1백89만3,000대를 국내외에 판매하고, 2000년에는 수출 143만대, 내수 77만대등 2백20만대를 판매하겠다고 발표했다. 또 2003년에는 수출 1백60만대, 내수 1백20만대등 2백80만대를 생산, 판매하기로 했다.
이렇게 될 경우 현대의 세계위상은 생산기준으로 현재 세계 13위에서 내년에 12위, 2001년 11위, 2003년 10위권으로 도약하게 된다.
이런 의욕과 구상을 가능케한 것이 바로 기아자동차의 인수성공이다. 이로써 현대의 세계적 위상을 한단계 높아지게 됐다. 기아의 인수는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젊은 자동차업체 회장」이란 鄭회장의 타이틀에 「세계 10대메이커 경영자」라는 내실을 더하는 계기로 평가되고 있다.
현대의 기아 인수는 국내 자동차산업을 전면적으로 재편, 양강(현대·대우)-1약(삼성)의 구도로 재편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될 전망이다. 당초 현대가 기아 인수전에 참여했을 때 「삼성 견제용」으로 분석됐다. 그러나 현대는 누구 보다 적극적으로 인수에 나섰고, 결국 「미래의 경쟁자」인 해외의 포드와 국내의 삼성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게 됐다.
현대가 가장 우려했던 구도는 포드-삼성-기아의 연합. 이 경우 현대와 대우의 입지는 크게 줄어들게 됐다. 대우경제연구소는 이 구도를 기존 업체들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로 보고 『삼성이 단기간에 국내 2외, 궁극적으로는 정상에 오를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현대의 기아인수가 결정된 직후 국내 기자단과 함께 폴란드를 방문중에 있던 김우중(金宇中) 전경련회장이 『잘 된 일』이라며 『한국 자동차 산업은 2사체제로 재편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이런 인식을 잘 담고 있다.
현대의 결단이 갖는 의미는 또 있다. 지지부진하던 5대기업의 빅딜을 촉진시키는 게기가 됐다는 것. 현대는 기아 인수가 결정되기 직전 발전설비, 철도차량 부문에서 일원화에 전격 합의했다. 현대측에서 보면 양보다. 이를 계기로 재벌간 빅딜은 본궤도에 진입했다. 현대는 빅딜의 걸림돌에서 해결사로 등장했다. 이것은 재계에서 현대의 위상을 확인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기아·아시아인수가 최종 확정되면 현대는 자동차 관련기업만 8개를 거느린 「자동차그룹」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엄청난 시너지효과로 현대는 21세기 치열한 세계 자동차시장에서 자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됐으며, 이를 기반으로 재계정상의 면모를 갖출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요즘 현대는 제2의 부흥기를 맞은 느낌이다. 야구·축구 등 스포츠에서, 대북(對北)경제협력 등에서. 현대의 기아·아시아자동차 인수는 「뜨는 현대」의 「결정체」이며, 경쟁기업들에게는 「결정타」가 될 수 있다.【박원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