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고객을 무시하지 않으면 초우량기업이라도 망할 수 있단다.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가 쓴 「성공기업의 딜레마;원제 THE INNOVATOR'S DILEMMA)」는 고객만족을 열심히 실천한 기업이 망하는 사례를 적시하고 있다.수십년간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게 경영되는 유통업체로 군림했던 시어즈(SEARS ROEBUCK)가 할인판매점에 밀려 위기를 맞은 것은 고객만족에 충실했던 결과라는게 크리스텐슨교수의 분석이다. 초우량기업의 대명사로 꼽히던 디지털 이큅먼트사가 추락한 것도 역설적으로 경영을 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고객만족 경영을 잘하다보니 망하게 됐다? 크리스텐슨교수의 주장은 「오늘의 고객」에게만 귀를 기울이다 보니,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게 될 「내일의 고객」을 놓치게 돼 위기를 맞는다는 것이다.
크리스텐슨교수는 기업 발전에 필수적인 요소인 혁신을 「존속성 혁신(SUSTAINING INNOVATION)」과 「와해성 혁신(DISRUPTIVE INNOVATION)」으로 나누고 있다. 기존 고객의 요구로 이뤄지는 혁신이 존속성 혁신이고, 와해성 혁신은 기존 고객의 요구는 충족시키지 못하지만 전혀 다른 성능을 원하는 새로운 고객이 요구하는 혁신이다.
하지만 대부분 초우량기업들이 오늘의 고객이 원하는게 아니고, 따라서 시장규모가 작지만 새롭게 부상하는 내일의 고객을 신경쓰지 않다가 위기를 맞는다는 얘기다. 대형컴퓨터시장을 지배하던 IBM이 소형컴퓨터의 출현을 간과하다가 위기를 맞았던 일이나 복사기의 상징인 제록스가 소형 탁상용 복사기시장을 무시했던 일 등이 좋은 사례다. 크리스텐슨교수는 이들 기업이 경영을 잘못했던게 아니고 오히려 현재의 고객에게 충실했던 탓에 위기를 맞았다고 분석하고 있다. 기존 고객이 원하는 제품을 더 많이 더 좋게 제공하는 기술에 공격적으로 투자하다가 위기를 맞았다는 것이다. 특히 소형컴퓨터, 소형 탁상용 복사기 등 새 시장이 초기에는 그다지 크지않아 눈여겨 볼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무시한게 잘못이라고 비난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고객을 무시하고 적은 이윤을 내는 낮은 성능의 제품에 투자해 작은 시장을 노리는게 옳다는 얘기인가? 크리스텐슨교수는 와해성 기술에 대해서도 대비해야만 우량기업의 위치를 놓치지 않는다고 충고한다. 기존 고객으로부터 자유로운, 현재의 고객을 무시하는 독립적인 조직을 만들어 새로운 시장, 와해성 혁신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충고다.
이세정 국제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