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선승리위해 어업협정 양보"

한·일협정 문서 공개
63년 전관수역 12마일로 축소…"독도폭파"는 日오히라 망언

이번에 공개된 한ㆍ일협정 문서를 살펴보면 대한민국의 전관수역이 현행 12마일로 축소된 것은 박정희 정권이 한ㆍ일 국교 정상화를 조속히 타결, 대선전에 승리하기 위해서 우리 바다를 양보했기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당시 협상에서 일본 정부는 독도에 강한 집착을 보이고 일제 통치를 합리화하는 망언을 일삼는 등 방자한 태도로 일관한 것으로 나타났다. 26일 외교부가 공개한 한ㆍ일협정 문서에 따르면 한국은 1963년 7월까지도 ‘12마일 전관수역 방안으로는 영세어민의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40마일 전관수역을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63년 8월부터 ‘한ㆍ일 국교정상화를 연내에 타결해야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중앙정보부 등의 의견이 전달되면서 일본이 요구하는 12마일로 돌연 입장을 바꿨다. 특히 박정희 정권은 12마일 전관수용 방안을 서둘러 수용했지만 선거를 앞두고 여론 악화를 우려해 사실 공개를 대선 이후로 늦추는 등 조직적으로 언론을 통제했다. 또 일본은 회담 내내 ‘독도가 해결되지 않으면 국교정상화는 불가능하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의도대로 협상이 안되자 독도 폭파를 주장했다. 62년 9월에 열린 한ㆍ일 예비절충 4차 회의록에 따르면 이세키 유지로 아세아 국장은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 공원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과 회담을 마친 후 귀국회견에서 “농담으로는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 똥도 없으니 폭파해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고 말해 엉뚱하게 독도 폭파 발언자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특히 일본은 제 3차 회담에서 구보타 일본 수석대표는 “일제통치가 조선에 기여했다”며 “일본은 36년간 벌거숭이산을 푸르게 바꾸었다던가, 철도를 건설한 것, 수력발전이 상당히 늘어나는 것 등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줬다”는 망발을 해 회담이 4년이나 표류 됐다. 한편 한ㆍ일 양측이 전후 일본에 잔류하는 한국인의 법적 지위 문제를 놓고 1965년까지 14년간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 우리측은 60만명에 달하는 재일한인에게 특수한 법적지위와 처우를 요구했지만 일본은 일반 외국인으로 취급, 다른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대우하겠다고 맞섰다. 또 한국 정부는 1950년 10월 일본의 패전으로 인한 우리나라의 승전국 지위 확보에 대비해 간도가 우리 영토라는 자체 지침을 마련했으나 1951년 전후처리를 규정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전승국 지위를 확보하지 못함에 따라 이 지침을 외교적으로 주장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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