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조선에 온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고종의 면전에서 무엄하게도 으름장을 놓았다. 암탉은 명성황후를 이르는 말이었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견제하려는 명성황후가 일본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명성황후는 일본이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할 인물이었다.
1895년 10월8일 새벽 궁궐에 침입한 일본 낭인들은 명성황후를 난자해 시해했다. 이른바 을미사변이다.
100여년 전 조선 왕궁에서 벌어진 참극을 기록한 러시아 공사 위베르는 보고서에서 ‘황후 마마가 복도로 달아나자 뒤쫓아가 바닥에 쓰러뜨리고 가슴 위로 뛰어 올라 세 번 짓밟고 칼로 시해했다‘고 적고 있다.
이날 새벽 궁궐 정문인 광화문에서 최초의 총성이 울렸다. 이것을 신호탄으로 대기하고 있던 일본 군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 궁궐의 북서문인 추성문과 북동문인 춘생문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궁궐의 전방과 후방에서 일본인들의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자 궁궐을 지키던 시위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모두 흩어져 달아나버렸다. 15분 만에 일본군은 광화문을 장악했다.
궁궐에 들어온 낭인들은 명성황후를 찾아내 시해한 후 시신을 궁궐 밖으로 운반해 불태웠다. 전쟁도 아닌 평화시에 군대와 낭인들을 동원해 궁궐을 습격하고 한 나라의 국모를 서슴없이 시해한 사상 유례 없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일본 정부는 사건을 은폐하고 국제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당시 관련자 47명을 입건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무죄 석방했다.
그리고 사건의 증거를 모두 폐기하고 일본 정부의 개입을 차단한 채 민비시해라는 단순사건으로 처리했다.
일본은 지금까지 일관되게 정부의 개입을 부인해왔지만 최근 발굴된 자료에서는 일본 정부가 적극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참으로 뻔뻔스러운 민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