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 낡은 관행 버리고 `새 표준' 요구

국제통화기금(IMF)체제는 구제금융 제공과 함께 하나의 표준(글로벌 스탠더드)을 요구하고 있다. 1년전 IMF 구제금융으로 겨우 외화부도위기를 모면했지만 이후 1년동안 IMF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 IMF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글로벌 스탠더드를 준수할 수 밖에 없었던 실정이다. IMF가 미국자본주의의 첨병(尖兵)으로 미국적 가치를 강요하고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어쨋든 현재 세계경제체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글로벌 스탠더드를 준칙으로 삼아야 할 상황이다.「아시아적 가치관」이나 「한국적 가치관」을 내세운 그동안의 기업 관행이나 경영방식은 IMF체제아래서는 더이상 인정받을 수 없게 됐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경제 분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전반을 지배하는 하나의 표준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5대그룹의 「빅딜」로 대표되는 기업 구조조정이나 사외이사제의 도입, 그리고 소액주주들의 반란 등 IMF체제에 들어선 이후 우리 기업들이 겪고 있는 각종 진통들은 따지고 보면 한국적 관행에서 벗어나 글로벌 스탠더드로 가기 위한 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한 대량 실업 사태는 평생고용이라는 우리 기업 풍토를 바꾸어 놓았다. 기업은 종업원을 언제든 해고할 수 있고 직장인은 항상 실업을 가정하고 살아야 하는 선진국형 기업 풍토 속에 놓여지게 됐다. 한국적 기업 풍토에서 세계적인 하나의 표준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해고나 실업을 가정하고 살아가야 하는 직장인들의 고통도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새로운 표준에 적응해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IMF구제금융 신청이후 변화된 기업 환경속에서 지난 1년간 우리사회가 글로벌 스탠더드시대로 달려온 숨가쁜 행보를 읽을 수 있다. ◇사외이사가 정책 결정을 주도하는 시대가 열린다. 삼성자동차나 쌍용자동차의 자동차 사업 진출은 그룹회장의 야망을 반영한 대표적인 사업으로 꼽힌다. 그룹내 반발이 있기는 했지만 누구도 드러내 놓고 반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결국 무모한 사업계획은 그룹 경영에 엄청난 「짐」을 안긴 채 쌍용자동차는 대우로 넘어갔고 삼성자동차는 대우전자와의 「빅딜」을 앞두고 진통을 겪고 있다. 기업이사의 대부분이 총수가 지명했거나 총수 자녀 또는 친인척인 상황에서 무리한 사업게획인 줄 알면서도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 그동안 우리 기업 경영의 현실이었다. 「기업을 봉토로 여기면서 전횡을 부리는 한국 재벌 총수들의 전근대적인 경영이 한국경제 위기의 근본 원인」이라고 지적한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보도도 이같은 우리 기업의 경영 실태를 꼬집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업 경영방식은 IMF체제 아래서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 기업 총수는 계열사 대표이사로 탈바꿈해 이사회를 주재해야 하며 사외이사들이 자리를 차지해 기업 경영을 감시한다. 사외이사제도가 도입된 것은 지난해 4월. 이사회를 중심으로 경영이 이뤄지고 있는 미국식 기업 경영 방식이 기업 구조개편방안의 하나로 우리나라에도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지난해 10월말 현재 국내 752개 상장회사에서 764명의 사외이사가 선임돼 활동중이어서 외형상으로는 사외이사제도가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그동안 임원회의나 다를바 없었던 이사회가 제대로 된 이사회의 형식을 갖춰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사외이사제도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가야 할 길이 멀기만 하다. 사외이사 대부분이 대주주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전직 임직원이나 친분관계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기업 경영진에 대한 감독기능을 수행하는데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작으면서도 의미있는 변화들은 일어나고 있다. 최근 들어 금융기관들의 사외이사들이 중요한 안건을 다룰때 적합한 절차와 의사록 작성 등 투명한 처리를 요구하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다.' 과거 상정된 안건을 일사천리로 처리하던 관행에 비추어 볼때 의미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사회의 비판 , 감시 기능이란 것은 책에서나 볼수 있는 얘기였지요. 과거 이사회는 총수가 결정한 사항을 통과시키는 곳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사외이사들이 참석하고부터는 형식적으로나마 이사회다운 이사회를 하게됐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외이사제를 지켜본 대기업의 한 임원의 말 처럼 이제 세계적 표준을 갖춘 이사회로의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소액주주의 목소리가 커진다. 우리나라에서도 소액주주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3월부터 참여연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기업 투명성 확보를 위한 소액주주운동은 경영진들에겐 공포의 대상이다. 지난해 3월 삼성전자의 주주총회는 무려 13시간이나 걸렸다. 참여연대의 장하성고려대 교수와 박원순변호사 등은 불과 1%의 의결권을 위임받아 삼성전자가 삼성자동차에 우회지원해 주주들에 피해를 입힌 사례와 해외 현지법인의 부실경영 등을 문제 삼으며 책임을 추궁했다. 의장인 윤종용사장은 이들의 『이의있습니다』라는 외침속에 13시간을 시달려야 했다. 고려대 張교수가 97년에 한보 부실대출을 문제삼아 제일은행측에 소액주주를 대표해 임원해임과 여신심사위원회 도입 등을 요구하고 나섰을 때만 해도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난해 7월 전직이사 4명을 대상으로 국내 최초의 주주대표 소송을 제기해 400억원의 손해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대림통상의 경우 소액주주들이 경영참여를 시도,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 주주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주주자본주의가 확고하게 자리잡은 미국의 경우 기업 경영진이 가장 중요시 하는 경영지표는 주주에게 얼마만한 이익을 안겨주었느냐는 것이다. 물건을 많이 팔고 순이익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주주에 대한 배당이나 시세차익을 확보해주는 등 주주에게 금전걱 혜택을 안겨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외국투자가들이 국내 기업에 요구하는 것도 주주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글로벌 스탠더드의 도입이다. 정부도 증권거래법을 개정해 소수주주권의 행사 요건을 대폭 완화했다. 상장법인 주주의 경우 의결권이 있는 발행주식의 0.01%만 소유하더라도 경영진에게 부실경영 책임을 묻는 대표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됐다. 소액주주에 의한 경영감시 기능인 주주제안권과 대표소송 제기권, 인사·감사해임 청구권과 회계장부 열람권 등의 권리행사가 앞으로는 줄을 이을 전망이다. 오너중심의 기업관행이 뿌리깊은 일본에서도 90년대들어 경기 불황과 함께 소액주주들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매년 200건이상의 주주 대표소송이 법원에 제기되고 있다는 통계는 우리 기업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회계기준 투명해야 기업이 산다. IMF구제금융 신청이후 외국 투자자들은 한국기업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한국기업들의 회계 기준이 투명하지 못하다는 지적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와 비교할때 국내 회계기준은 선택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사항이 지나치게 많아 기업이 임의로 회계장부를 조작할 수 있다는 불신이었다. 부당 내부거래를 통한 당기 순이익 및 외형 부풀리기 등 다양한 수법으로 기업집단의 경영 성과가 왜곡돼 왔던 것이 사실이다. 기업이 작성·공표하는 재무제표가 기업의 이익을 불리고, 외부 감사인은 이를 묵인하는 형태의 분식결산이 그동안 기업경영의 관행처럼 자리를 잡아왔다. 이같은 관행은 글로벌 스탠더드시대에는 더 이상 관행이 될 수 없다. 정부가 마련한 개정 기업회계기준은 국제 회계기준(IAS)와 미국회계기준(USGAAP)과 동일하게 변경됐다. 이에 따라 기업은 이연자산으로 처리하던 외화평가손익을 당기에 손익으로 처리해야 한다. 또 금전 대차거래를 포함한 모든 채권과 채무에 대해, 취득시는 물론 상환조건·이자율 등 조건 변경시에도 현재의 가치평가를 반영해야 하기 때문에 더이상 허수의 회계장부를 만들 수 없게 됐다. 계열사간 상호출자와 지급보증 등 내부거래에 대한 정보를 공시해야 하기 때문에 그동안 부당 내부거래를 통해 당기순이익과 외형 등을 부풀려왔던 기업들의 경영성과는 낱낱히 드러날 수 밖에 없다. 결국 기업들은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새로운 제도의 틀 속으로 들어와야 하는셈이다. 숨기고 부풀려온 기존의 기업관행을 버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M&A(기업 인수합병)가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사회가 온다. 기업을 배경으로 한 외국영화, 특히 헐리우드 영화를 보면 기업을 사고 파는 얘기들이 자주 등장한다. 기업을 사들여 분할 매각하기도 하고 이를 다른 기업에 넘기기도 한다. 미국에서는 기업 인수·합병이 그만큼 일상화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기업은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대농그룹이 주력기업인 미도파의 경영권을 인수하려던 신동방그룹에 맞서기 위해 경영권 방어에 1,000억원에 달하는 돈을 쏟아붓다 결국은 그룹 해체라는 비운을 맞게 된 것은 우리 기업들이 M&A에 대해 얼마나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주주의 이익을 해치지 않는 범위내에서 기업을 사고 파는 M&A시장이 활성화된 선진국에서는 거대기업들의 M&A관련 뉴스가 자주 등장한다. 시티은행의 지주회사인 시티코프와 트래블러스 그룹간의 합병이나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인 벤츠와 크라이슬러의 합병 등 최근들어 세계적인 거대기업들간의 M&A도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IMF이후 국내에서도 이같은 M&A가 국가와 기업경쟁력 제고 차원에서 인위적으로나마 이뤄지고 있다. 인위적 M&A에 대한 반발과 예상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또 M&A라는 개념이 도입된지 10년도 채 안되는 우리나라가 100여년간 M&A를 통해 기업을 키워온 미국과 같을 수는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많다. 하지만 M&A는 이미 세계적으로 보편적이고 일상적인 기업 경영전략의 하나로 뿌리를 내렸다. 기업 입장에서 「권장할 만한 거래」는 아니더라도 「존재하는 거래」로는 받아들이라는 것이 글로벌 스탠태더드시대의 요구인 것이다. ◇직장 풍속도가 달라진다. IMF이후 대량 실업사태는 직장 풍속도를 바꿔놓고 있다. 평생직장의 개념이 사라지고 있다. 해고와 실업이 일상화되면서 직장은 이제 자신의 보호막이 될 수 없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스스로를 상품화해 자신을 마케팅하는 사회가 눈앞에 놓여져있는 것이다. 이제 한 직장에 소속한 직장인이기보다는 나름대로 주특기를 갖춘 직업인으로 자리잡고자 하는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李모과장은 지난해 상반기 입사이후 10년간 근무했던 기업을 떠나 그룹내 다른 계열사로 자리를 옮겼다. 섬유업체인 이 회사가 그룹내 계열사가 통합되면서 자신을 비롯한 부서원들이 각 계열사로 뿔뿔이 흩어졌다. 李과장은 나름대로 능력을 인정받아 오히려 탄탄한 계열사 과장으로 옮겼지만 뒷맛은 영 개운치 않다. 앞으로도 지금의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을지 불안하기도 하고 직장 생활에 대한 회의도 든다. 그래서 李과장은 어려운 형편에도 대학원을 다니기로 결심했다. 『대학원을 다닌다고 해도 별다른 계획이 있는 건 아니지만 불안한 미래에 대한 적금을 든다고 생각하면 속이라도 편하다는 생각에서 결심을 하게 됐어요』 李과장같은 사례가 직장인들사이에서는 이미 보편화되고 있다. 막연한 불안감이 직장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실업에 대한 불안뿐 아니라 국내 기업들에 확산되고 있는 연봉제도 개인의 상품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고 있다. 업적과 능력만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되는 직장 풍토 속에서 선후배나 입사동기라는 말들은 점차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이훈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