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상처 하나 없는데 어떻게 추락사라고 할수 있나요"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약사봉에서 항일운동가 출신 재야운동가 장준하(당시 57세) 선생이 변사체로 발견됐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장씨가 등반 중 실족사했다고 발표했지만 유족 및 재야단체등은 `정치적 타살' 의혹을 제기하며 줄기차게 진상규명을 요구해 왔다.
그의 사망을 둘러싼 수수께끼가 30년이 다 되도록 풀리지 않는 가운데 연합뉴스는 당시 사법기관 관계자로는 사고 현장에 처음 도착, 장 선생의 사체를 목격한 이수기(59)씨를 만났다.
당시 순경으로 포천경찰서 이동지서에 근무하다 2년전 퇴직한 이씨는 30년전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사고 당일 근무였는데 경기도경으로부터 장 선생의 추락사 소식을 알리는 경비 전화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갔다"면서 "지서로 신고가 오지 않고 도경에서 먼저사고 소식을 안 것은 장 선생의 집이 도청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씨는 "지서에서 4㎞여 떨어진 사고 현장 입구에 가보니 관광버스가 보였고 장선생의 일행들이라고 밝힌 등산객들의 안내를 받아 사고 지점으로 갔는데 현장에는의료진으로 보이는 군인 2-3명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면서 "동행자가 누군지를 물었고 김모(약사봉 등정 당시 장 선생이 일행을 빠져나와 약사봉으로 향할 때 혼자 뒤따라간 뒤 사고 사실을 일행에게 맨 처음 알린 인물)씨라고 했는데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특히 이씨는 "물이 흘러 이끼가 낀 14m 높이 절벽에서 떨어졌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장 선생의 몸은 깨끗했다. 몸에 핏자국이나 상처 하나 없었다. 머리는 비스듬히 동쪽을, 다리는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귀 뒤에 상처로 보이는 점(장 선생사체 검안 의사가 `사체 검안소견'에서 지적한 오른쪽 귀 뒷 지름 약 2cm 함몰 부문을 일컫는 것으로 보임)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본서에 보고하기 위해 현장에서 내려오다 3명의 건장한 청년을 만났고 그들 중 한명이 `본대로만 진술해라'라는 말을 했다. 정보요원처럼 보였다"고 말했다.
장 선생 사건 이후 3개월만에 인근 다른 지서로 옮긴 이씨는 이듬해 고향으로 내려와 근무한 뒤 2002년 퇴직했다.
이씨는 2001년 의문사 진상규명위의 첫 현장 조사할 때 사고 현장 안내를 맡았다.
이씨는 "당시 사고 장소를 아무도 몰라 안내를 맡았는데 사고 1개월 뒤 백기완씨 등이 세운 비가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장준하 선생의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김씨와 관련해서는 "그가 정보기관 요원인지 포섭됐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2001년 의문사위에서 대질신문을 했는데 김씨가 당시 자신이 현장에 있었고 경찰에 신고했다는 말을 해 당황했었다"고 말했다.
의문사위에 9번이나 출석해 조사를 받은 이씨는 "당시 현장에 첫 출동한 경찰관으로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추락사라고 도저히 믿기 어려웠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장 선생 의문사 사건은 의문사진상규명위 1기와 2기에서 모두 '진상규명불능' 판정을 받았으며 최근 국정원의 과거사 진상 우선조사 대상에서도 제외됐다.
장 선생의 30주기 추모제는 17일 오전 경기도 파주시 광탄리의 천주교 나자렛 묘지에서 열린다.
(광주=연합뉴스) 남현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