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능 뛰어난 고분자 분리막 개발
한번만 걸러도 순수 프로필렌 얻을수 있어
장치 간단 제작비용도 증류탑보다 훨씬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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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주머니 속에 빨간 공과 파란 공이 50개씩 섞여 있다. 이 중 빨간 색 공만 골라내라.
단 공의 생김새와 크기는 같고 무게도 비슷하다. 힌트는 한 쪽이 전기에 대한 성질이 다르다는 것. 물론 쉬운 방법은 있다.
공을 모두 쏟은 뒤 손으로 골라내면 된다. 그런데 규칙은 공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답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의 강용수 박사는 문제 속에 숨어 있는 힌트에 주목한다.
그는 "답은 전자석과 같이 외부 환경에 따라 특정한 것만 당기거나 밀어내는 성질"이라고 말한다. 전자석은 전기를 걸어주면 자석이 되고, 끊어 주면 자석의 성질을 잃게 된다.
빨간색 공은 자석에 잘 끌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강 박사는 빨간색 공을 빠르게 골라내는 전자석을 만든다. 그가 솎아내는 빨간 공은 '프로필렌', 파란 공은 '프로판'이다. 프로판과 프로필렌은 모두 원유 속에 들어있는 길다란 탄화수소를 뚝뚝 끊어내면(크래킹ㆍ분해증류) 만들어진다.
이 중 프로판은 밥을 짓는 등 집안의 땔감으로 주로 사용한다. 반면 프로필렌은 폴리프로필렌 등과 같은 고분자를 만들거나 아세톤ㆍ글리세롤 등 유용한 물질을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다.
프로판과 프로필렌은 골라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프로필렌은 끓는 점이 섭씨 영하 47.7도, 비중은 0.5139(공기 1)다. 프로판의 끓는 점은 영하 47.07도, 비중은 0.547.
지금까지는 1도가 채 되지 않는 끓는 점 차이를 이용해 분리했다. 석유화학 공장에서 많이 보이는 높이 100미터짜리 탑은 끓는 점 차이를 이용해 이들을 서로 분리해내는 증류장치.
이들 탑 내부는 영하 30도로 매우 차갑다. 생김새와 크기가 거의 같은 빨간ㆍ파란색 공을 일일이 저울에 재보고 작은 무게차이로 골라내는 것과 같다.
강 박사는 저울이 아니라 전자석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운반체를 이용한다. 그런데 이 운반체는 프로필렌을 끌어당겼다가 곧바로 놓아준다. 하지만 프로판엔 관심이 없다.
전자석 역할의 운반체는 은염 이온. 강 박사는 "은염을 남자, 프로필렌ㆍ프로판을 여자라고 한다면 은염은 프로필렌에만 매력을 느낀다"고 설명한다.
운반체는 프로필렌의 징검다리가 되어 프로필렌만을 쉽게 건너 가게 하지만 프로판은 못가게 막아 준다.
초등학교 때 여러 명이 한 줄로 서서 물 양동이를 나르는 것처럼 은염은 프로필렌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이어 나른다.
강 박사는 한 쪽에 프로필렌과 프로판이 뒤섞인 기체를 넣고 은염이 포함된 막(膜)을 만들었다. 그러자 막 반대편에는 프로필렌만 걸러져 나왔다. 그는 은염이 막에 고루 퍼지도록 하기 위해 고분자에 녹여 사용하였다.
고분자 막을 이용한 분리장치는 증류탑에 비해 월등한 성능을 낸다. 한번만 걸러도 99% 순수한 프로필렌을 얻을 수 있다. 반면 증류탑은 수백 번을 끓였다가 응축시켜야 99%이상 순수해진다.
장치도 간단하다. 만드는데 드는 돈은 수십 미터짜리 증류탑에 비교되지도 않을 정도로 쌀 것이라 기대된다.
"프로필렌과 프로판뿐만 아니라 에틸렌과 에탄도 모두 걸러낼 수 있어요. 에틸렌도 프로필렌처럼 다양한 용도가 쓰이죠." 강 박사가 만든 고분자막 분리장치는 이전에 만든 분리장치에 비해서도 성능이 수 천배 뛰어나다.
고분자 분리장치는 당장 석유화학 공장의 증류탑을 대체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더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얼마나 오래 사용할 수 있느냐가 첫번째로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다.
증류탑을 대체하는 일은 너무 엄청난 일이라, 오히려 강 박사는 새로운 용도에 더 관심을 갖는다.
" 공장에서는 질이 떨어지는 혼합가스가 많아요. 분리하는 데 드는 돈보다 얻는 가치가 적죠. 그래서 대부분은 연료로 쓰죠. 이 가스를 고분자 분리막을 통해 거르면 충분히 경제성이 있어요. 환경오염도 줄일 수 있고요."
◇약력
▲ 53년 경남 합천생
▲ 76년 서울대 공업화학과
▲ 78년 한국과학원 화학과 석사
▲ 81~86년 미국 텁스(Tufts)대 화학공학과 박사
▲ 8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선임ㆍ책임연구원(촉진수송분리막연구단장)
▲ 한국공업화학회ㆍ한국막학회 총무이사, 한국고분자학회
▲ 과학기술부 장관상(우수 연구,90년)ㆍKIST 연구개발팀상(97년)ㆍ기초기술연구회 이사장상(수상예정)
▲ 박정은씨와 2남
문병도기자 do@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