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숙인 다시서기 센터' 에서 운영하는 '성 프란시스 대학' 인문학 과정을 수강 중인 최현우(모자 쓴 이)씨와 노숙자들이 국립중앙박물관 견학에서 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유물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사진=노숙인 다시서기 센터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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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 최현우씨 "절망의 나락서 희망을 찾았어요"
"중학교도 못 나온 제가 철학 공부할줄은…"만신창이 몸 치료받다'다시서기 센터'와 인연강사들 열정적 강의 들으며 삶의 자신감 되찾아
이성기 기자 sklee@sed.co.kr
'노숙인 다시서기 센터' 에서 운영하는 '성 프란시스 대학' 인문학 과정을 수강 중인 최현우(모자 쓴 이)씨와 노숙자들이 국립중앙박물관 견학에서 강사의 설명을 들으며 유물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다. 사진=노숙인 다시서기 센터 제공
“중학교도 제대로 못 나온 제가 소크라테스니 플라톤이니 하는 철학자들을 공부할지 꿈이라도 꿨겠습니까?”
200년을 마무리하는 지난 31일 서울시 용산구 갈월동에 있는 ‘노숙인 다시서기 센터’(이하 다시서기 센터)에서 만난 최현우(52) 씨는 이따금 손을 바르르 떨었다.
지난 2003년부터 시작한 3년 간의 노숙 생활 끝에 얻은 당뇨병과 고혈압의 후유증이다.
50대 초반임에도 벌써 거의 다 빠져버린 머리카락과 성한 곳이 별로 없는 치아는 그가 거쳐온 시간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에서만 보던 노숙인이 바로 제가 될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빈곤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 거죠…”
지난 1996년 10여 년간 근무하던 섬유회사에서 노사 갈등이 빌미가 돼 강제 퇴직 당한 그는 쥐꼬리만한 퇴직금과 처가의 도움으로 양계장을 차렸지만 경험부족과 이듬해 터진 IMF사태로 파산을 맛봐야 했다.
엎친 데 덥친 격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견디다 못한 부인의 가출과 천식을 심하게 앓던 어머니의 사망은 끝내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그때는 삶의 희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루하루 술로 날을 지새는 경우가 허다했죠”
재기의 노력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우연한 기회로 서울 영등포 역 근처에 있는 인력회사에 일자리를 얻은 그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며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다 하청사업에 손을 댔는데 연쇄 부도가 터지면서 인부들의 임금을 주고 나자 수중에는 달랑 3만원만 남았다.
그때부터 영등포 문래 공원에서 노숙인 생활을 시작했다.
“반 강매인 ‘떡장사’부터 어린이를 시키는‘앵벌이’, 여기저기 다니며 구걸하는 ‘생꼬지’등 안 해 본 게 없다”는 그는 “돈이 조금 생기면 술만 마시면서 거의 자포자기 심정으로 살았다”고 돌이켰다.
3년 간의 노숙생활로 그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복수가 차 바지조차 못 입을 지경이 됐다. “‘이렇게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니 억울하기도 하고…”
그는 올해 6월 치료를 받기 위해 찾은 서울역 상담소에서 다시서기 센터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 곳의 도움으로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선정된 그는 지금은 삼성 코닝㈜에서 후원하고 다시서기 센터에서 운영하는 ‘성 프란시스 대학’인문학 과정 강의를 배우고 있다.
“ ‘과연 될까’하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대학 교수와 강사의 강의를 통해 차츰 자신감을 찾게 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갖게 됐습니다. ‘배움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싶더라고요”
노숙 생활을 벗어나 맞는 무자(戊子)년 새해 소망은 소박했다.
“저와 비슷한 처지의 분들이 포기하지 말고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계획을 세워 이뤘으면 좋겠습니다”
입력시간 : 2008/01/01 17: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