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한산대첩에서 왜 수군의 패전 원인은 장수들간의 전공다툼 때문이라는 주장이 일본인 사학자에 의해 제기됐다.
일본내 대표적인 임진왜란 연구가인 기타지마 만지(70.北島万次)씨는 12일 오후통영시민문화회관에서 열린 제44회 한산대첩기념 국제학술발표회에서 이같이 밝히고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수하 장수들사이의 전공다툼이 한산대첩의 승패를 갈랐다고 주장했다.
기타지마씨가 제시한 일본측 사료인 와키자카기(脇坂記)에 따르면 1592년(선조 25년) 6월14일 와키자카(脇坂). 구키(九鬼). 가토(加藤) 세 장수가 부산포에 진을 치고 조선수군을 침략하기 위한 전략을 검토하던 중 7월7일 다른 장수들이 아직 출격준비를 하는 동안 와키자카는 자신의 병력만을 이끌고 몰래 거제도로 출격했다.
7월8일 와키자카 수군은 통영-거제간 견내량을 침입했고 이순신은 왜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 학익진을 펼쳐 왜군 함선 70여척을 섬멸했다.
기타지마씨는 한산도 해전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단독공격은 조선수군을 얕본 측면도 있지만 와키자카의 공명심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임란 당시 조선에 출병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의 장수들은 원래부터 가신이면서 전공을 세워 영주(領主)인 다이묘(大名)로 임명된 자들과 도요토미가 천하를통일한 후 복속한 다이묘 두파로 갈려 있었다.
그중에서도 와키자카를 비롯한 가신출신의 장수들은 오직 전공을 통해서만 도요토미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이들은 '도요토미 발탁 다이묘'로 불렸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전장에서 다른 장수들을 따돌리고 자신이 제일 먼저 전공을 올려 도요토미로부터 더욱 인정을 받으려 했고 동료는 모두 라이벌이었다.
기타지마씨는 한산도 해전에서 와키자카만이 아니고 구키, 가토가 행동을 같이 했더라면 승패의 향방은 차지하더라도 왜 수군의 피해는 훨씬 적었을지도 모른다고 결론지었다.
(통영=연합뉴스) 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