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재단과 서울경제신문이 제정한 「이달의 과학기술자상」 제3회 수상자로 현대중공업 산업기술연구소의 정수원 부소장이 선정됐다. 정부소장은 현대중공업에 근무한 지난 25년동안 「조선의 생산자동화 기술개발」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 상을 수상하게 됐다. 그의 연구개발활동과 뒷이야기를 소개한다.<편집자주>◎세계적 조선국 견인 ‘땜장이 1호’/“일서 곡면용접 장비 개발” 신문보고 도일/일인 친구 찾아가 간청 차타고 ‘도둑견학’/사진한장 없이 머릿속 추리 석달후 개가
정수원 부소장은 주마간산의 대가다. 그냥 잠시 스쳐 지나더라도 그가 관심있게 보았다면 그 산은 산세가 어떻고 어떤 종류의 나무가 얼마나 자라고 있다는 것까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그가 보는 것은 물론 산이 아니고 기계다.
그에게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거나 「보는 것이 아는 것이다」는 격언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에게는 「보는 것이 곧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번 본 기계를 적어도 그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지난 91년 현대중공업이 LNG(액화천연가스)운반선 건조사업에 진출하면서 정부소장은 한번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용접장비를 만드는 과제에 착수했다.
LNG 운반선은 LNG를 저장하는 커다란 구형 탱크를 제작하는 것이 핵심기술이다. 이 구형 탱크는 LNG를 영하 1백60도의 극저온에서 저장하기 때문에 특수 알루미늄강판으로 만들어진다.
이 알루미늄 강판 하나의 크기는 가로 2m·세로 8m로, 두께는 28∼1백66㎜에 달한다. 헝겊으로 거대한 애드벌룬을 기워내듯 이 강판 160개를 이어붙여 지름 40m 크기의 구형 탱크를 만드는 것이다.
때문에 작업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구부러진 알루미늄 강판을 용접으로 이어붙일 때 나오는 용융액이 곡면을 타고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관심있는 분야면 신문에 난 1∼2줄짜리 기사도 오려두는 정부소장은 당시 어느 일본신문을 읽다가 미쓰비시에서 알루미늄강판을 1∼2번만에 용접하는 장비를 개발했다는 자그마한 기사와 사진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바로 이거다』
정부소장은 당시 도쿄에서 열린 국제용접전시회를 둘러본 뒤 미쓰비시에 근무하는 일본인 친구를 찾아가 그 장비를 한번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LNG 운반선은 자기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보여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끈질긴 부탁과 완곡한 거절의 실랑이 끝에 두 사람은 승용차를 타고 멀찌감치 지나가면서 그 장비를 주마간산하기로 합의를 봤다. 말이 아닌 자동차를 타고 산이 아닌 기계를 보기 때문에 「주차간기」라고나 할까.
그 장비로부터 30∼40m 떨어진 곳을 승용차를 타고 지나면서 잠시 머무르거나 내려 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스케치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부소장에게 「주차간기」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이날밤 호텔로 돌아가는 지하철 속에서 정부소장은 수첩을 꺼내 「주차간기」한 것을 기억해내어 스케치하고 기록했다. 또 호텔에서 밤새도록 그 장비의 작동원리를 궁리하고 추리했다.
한국에 돌아온 정부소장은 수첩의 노트와 신문에 난 기사 및 희미한 사진을 토대로 설계에 착수했다. 그리고 3개월만에 미쓰비시에서 본 것과 비슷한 시제품을 만들어냈다. 이 장비가 바로 대형 경사 조절장치다.
이 장비는 몇번의 개량 설계를 거쳐 이제 일본이 부러워할 정도로 성능이 좋아졌다.
정부소장은 개발한 상당수의 자동화장비는 이같은 「주차간기」로 만들어진 것이다. 일본이 기술누출을 꺼려 현장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문에 난 희미한 사진 한 장, 신문 기사 몇 줄, 멀리서 현장의 실물을 얼핏 본 기억, 재수가 좋으면 현장에서 작업자들이 장비를 운전하는 모습. 이 하나하나가 정부소장에게는 결코 놓칠 수 없는 귀중한 정보다.
이 정보가 정부소장의 머리와 손을 거쳐 자동화장비로 태어나면서 현대중공업을 세계적인 조선업체로, 한국을 세계적인 조선국가로 끌어올린 것이다.<허두영 기자>
◎연구업적/경사면 용접기술 노르웨이에 수출/생산자동화 설비 일 업계서도 찬사
현대중공업에서 선박건조·용접·자동화가 만나는 영역은 정수원 부소장의 몫이다. 지난 73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정부소장은 백지상태나 다름없었던 국내 조선업계에 용접기술을 정립하고 노동집약적인 조선현장에 자동화의 복음을 전파했다.
지난 83년에는 현대중공업에 용접기술연구소(현 산업기술연구소)를 설립하고 각종 용접기술과 자동화기술을 개발했다. 대한용접학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해 국가 산업기술 발전에도 기여했다. 정부소장의 주요 연구개발 업적은 다음과 같다.
◇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용 알루미늄 구형 탱크 제작기술=기술도입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특수 용접 자동화기술을 개발해 노르웨이의 커베나사에 기술을 수출하는 개가를 올렸다.
알루미늄 곡판 성형장치는 성형노에서 꺼낸 강판을 진공컵으로 들어 볼록 다이 위에 얹으면, 볼록 다이가 오목 다이가 있는 위치까지 이동하고 오목 다이가 내려와 강판을 곡면으로 성형한다.
대형 경사조절장치는 곡면으로 성형된 강판을 용접으로 이어붙일 때 용접 토치와 곡면이 수직을 이루도록 강판의 경사를 자동으로 조절한다.
대전류 불활성가스 용접장치는 곡면 알루미늄 강판을 용접으로 이어붙이는 장비로, 곡면 강판과 토치의 각도를 측정하여 경사조절장치에 전달하면서 곡면을 따라 자동으로 용접한다.
3차원 곡면용접용 자동용접장치는 구형탱크의 곡률에 따라 자동으로 용접할 수 있는 구조로 설계돼 궤도(레일)를 따라 움직이며 필요에 따라 궤도에서 분리할 수 있다.
◇선박 건조자동화시스템=현대중공업의 조선 공장에 각종 생산자동화시스템을 개발, 설치하여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켰다.
다방향 적응 소조립 판이음 자동용접장치는 전후·좌우·상하의 다양한 위치에 있는 용접 대상물의 형태에 따라 유연하게 용접할 수 있는 장치로,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작동할 수 있다.
선박 종통보강재 연속생산자동화시스템은 T형·L형의 세로로 긴 보강재를 자동으로 연속 용접하여 생산성을 높인 장비로, 일본 조선업계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28 전극 자동필렛 용접장치는 28개의 용접 토치가 나란히 지나가며 한꺼번에 28개 지점에서 동시에 용접하는 장치로, 용접의 신뢰성을 크게 높였다.
정부소장은 이밖에 현대중공업의 조선 제2공장과 LNG 운반선공장의 구조를 설계하고, 각종 용접 로봇 응용시스템을 제작했으며 공정설계와 작업 일정계획시스템 등도 개발했다.<허두영 기자>
◎심사평/LNG운반선 탱크제작 국내조선산업 꽃피워
정수원 부소장은 연구개발업적은 지난 70년대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국내 조선산업을 20여년이 지난 지금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실질적인 견인차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LNG 운반선용 알루미늄 탱크 제작분야에서 정부소장은 기술 종주국인 일본과 노르웨이가 놀랄만한 자동화시스템을 개발하여 「선박의 꽃」이라 불리는 LNG 운반선도 국내에서 제작할 수 있게해 제 3회 「이달의 과학기술자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이달의 과학기술자상」심사위원명단 ▲심사위원장:진정일 고려대 교수 ▲심사위원:장성도 이수화학 고문·강민호 한국통신해외사업본부장·김진동 서울경제신문주필·명효철 고등과학원부원장·박원훈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배무 이대교수·변광호 생명공학연구소장·손병기 경북대 교수·손재익 한국에너지연구소선임부장·이대운 현대자동차중앙연구소장·이리형 한양대 부총장·전의진 과기처연구기획조정관·정명세 한국표과학연구원장·채영복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사무총장
◎인터뷰/생산자동화 로봇 만들면 근로자들 “일뺏긴다” 부수기도/“모든분야 사양산업은 없다 현장서 부가가치 창출 노력을”
현대중공업의 정수원부소장은 그 흔한(?) 박사 학위도 없다. 부산대에서 조선공학을 전공하고 기계공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것이 전부다.
그는 5년전 48세의 나이에 울산대에서 박사 학위 코스를 밟기 시작했다. 5년이 되도록 그는 아직 논문을 쓰지 못해 「수료」에 머물고 있다. 논문을 쓸 거리는 주변에 널려 있는데 너무 바빠 논문을 쓸 시간조차 없다는 것이 그의 변명아닌 변명이다.
『박사과정을 시작한 것은 학위를 따겠다는 목표보다 울산대와 산·학 협동과제를 수행하면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학문과 현장을 접목시키기 위해 저부터 앞장서야 산·학 협동과제를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였죠』
그는 학위를 따기위해 강의를 듣은 것이 아니라 현장을 알기 위해 공부를 한 것이다.
정부소장은 한국의 용접기술사 1호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땜장이 1호』라고 웃으며 말한다.
『용접은 여러 종류의 금속을 이어붙이는 작업입니다. 용접할 금속의 특성과 형태에 따라 방법을 달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용접한 부위가 깨어지거나 부식돼 대형사고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용접을 『기계·금속·재료·전기 등의 공학을 종합한 기술분야』라고 설명하면서 『용접은 철저하게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경험공학』이라고 주장한다.
『배를 만드는 작업은 거의 대부분이 용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크고 작은 철판을 이어붙이면 배가 되는 것이지요. 얼마나 잘 이어붙이냐 하는 것이 기술의 우열을 결정합니다』
길이 3백20m·폭 51m·깊이 26m의 25만톤급 유조선(VLCC)의 경우 용접한 총길이는 9백㎞에 달한다. 이 유조선의 둘레를 따라 돌며 약 1천바퀴를 용접하는 길이다.
『조선의 경우 실내에서 용접하는 작업이 거의 없습니다. 특히 더운 여름 철판위에 달걀을 깨어 얹으면 그대로 「후라이」가 되는 뜨거운 환경이나, 몸이 겨우 들어갈만한 좁은 공간에서 작업을 해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도 번쩍이는 광선과 튀는 불똥으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보안경을 끼고 작업복을 입어야 합니다. 이런 열악한 환경을 극복하는 방법은 자동화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용접 로봇은 생산성 향상의 수단이라기보다 휴머니즘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부소장은 자동화 시설을 개발하는 것보다 현장 사람을 설득하는 게 더 힘들다고 털어놓는다.
『현장 사람들은 작업 환경이 바뀌는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또 자동화 시설이 들어서면 로봇이 자신의 일을 빼앗는다고 생각하고 로봇의 작업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수십억원 들여 개발한 로봇을 일부러 고장내 버리거나 터무니 없는 핑계를 대며 용접이 잘 안된다고 트집을 잡는다는 것. 이에 정부소장은 직접 용접공들을 설득하다 멱살을 잡히기도 했다.
또 용접공들이 모두 퇴근한 밤중에 현장에 나가 용접할 부위에 직접 페인트 칠을 벗기고 그라인딩한후 용접까지 해보며 용접공들의 애로를 몸소 체험하느라 새벽에 충혈된 눈으로 새벽에 퇴근하기도 했다.
『산업현장은 곧 산업경쟁력의 현장이지요. 현장은 지나친 첨단을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보다 한발만 더 앞서 가면 됩니다. 정부가 이 한발을 앞설 수 있도록 하는 기반기술개발에 힘을 써줬으면 좋겠습니다』고 말했다.
정부소장은 『모든 분야에서 사양산업은 결코 없다』며 『현장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선진국형 생산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산업 경쟁력을 높일수 있는 관건』이라고 강조한다.<허두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