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영어로 된 책을 읽다가 현재의 한국을 ‘6공화국(Sixth Republic)’이라고 지칭한 것을 발견했다. 무척 생경한 느낌이었다. 지난 87년 민주화 이후 우리는 같은 헌법과 권력구조를 갖고 있다. 바깥에서 볼 때 58년 신헌법 이후 프랑스가 ‘5공화국’인 것과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게 당연할 성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우리 스스로 민주화의 성공은 자랑하지만 그 결과인 6공화국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고 있다. ‘5·6공의 잔재 청산’이라는 부정적 표현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기억하고 보존해야 할 ‘공화국’이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4·19 혁명과 함께 2공화국이 출범하자 스물다섯 청년이었던 최인훈은 몇 개월 작업 끝에 전후 최고의 문제작 ‘광장’을 써냈다. 60년 이 소설이 실린 잡지에는 이런 작가소감이 실려있다. “구 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감사할 따름이다.” 이 가슴 벅찬 자부심이 거듭해서 배반당한 것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질곡일 것이다.
‘공화국’만큼 우리에게 낯익고도 낯설은 말은 없을 것이다. 헌법의 1장 1조에서 우리 국체를 규정하는 말(민주공화국)이면서도 실지로는 억압적 통치를 미화하는 도구로 반복적으로 활용되면서 본래 의미가 훼손됐다. 정전상황에서 ‘주적’이었던 북측 ‘인민공화국’의 존재가 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음은 물론이다.
요즘 서구 학계에서는 공화주의(Republicanism)가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한다.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로 판명나고, 시장 자유주의가 전세계를 지배하면서 빈곤과 양극화의 심화는 공동체의 유대와 통합을 위협하고 있다. 이런 환경이 개인자유와 공동선 간의 조화를 도모하는 ‘공화주의’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을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공화국’이라는 이름이 제 자리를 찾을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공화국’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기억은 어둡지만 우리가 ‘민주공화국’의 이상을 향해 한걸음씩 전진해 왔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史實)이다. 기존의 공화국을 부정하려는 인식은 새로운 것에 대한 강렬한 추구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최근 남북 정상회담과 함께 한반도에 평화·번영의 기운이 높아지고 있다. ‘공화국’이라는 말의 본뜻을 찾아줄 또 한번의 기회가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