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동란 이후 폐허가 된 도시를 살리기 위한 국가의 건축정책은 신속한 공급만이 대안이었다. 그러나 이제 선진국으로 진입하는 과정 속에서 건축물의 존재와 가치에 대한 인식이 재정립돼가고 있다. 건축과 도시의 문화적 중요성이 21세기 미래시대의 국가경쟁력으로 부상하면서 국민들의 문화적 욕구가 날로 커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제대로 디자인돼 인정 받은 건축물 하나가 세계적인 관광지로 탈바꿈되고 그 도시를 살리고 국민의 자긍심으로 승화되는 경우를 보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건축은 우리 삶의 터전이며 그 자체가 문화이다. 건축은 예술성이 포함되지 않고 철학이 담겨지지 않으면 단순한 덩어리 구조물일 뿐이다. 건축물에 기술과 예술과 철학을 담는 전문가가 바로 건축사이다. 예술과 철학은 창조적이어야 하다. 때문에 설계를 하는 전문 자격자인 건축사는 독립적이며 구속 받지 않는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보장돼야 한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경제력이 강한 개발업자나 토지소유자ㆍ건설사의 상업적 입김으로 건축물이 세워지면 국민들의 문화적 삶의 혜택은 멀어지게 될 것이며 이런 미개한 문화를 가진 자들은 역사 속으로 후퇴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최근 서울시가 발표한 “똑같은 모양ㆍ높이의 성냥갑 아파트는 더 이상 없다”라는 ‘건축심의 개선 대책안’은 매우 시의 적절한 조치다. ‘디자인이 살아있는 공동주택’ ‘매력과 개성이 넘치는 공동주택’을 추구하는 서울시의 방침을 우리 대한건축사협회는 1만여 건축사들과 함께 이를 전폭 지지하며 환영한다. 이번 서울시의 발표는 이제 우리 국민들도 참다운 건축과 도시문화 공간에서 수준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겠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높은 가치추구의 발상으로 평가한다.
지금까지 건설된 성냥갑 아파트는 경제적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그러나 서울시의 방침대로 다른 모양과 높이, 다양한 평면과 배치계획은 사업적인 희생이 따른다. 이는 건설ㆍ주택사업자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건축문화에 대한 중요성과 이해가 없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정책이다. 그렇기에 서울시의 건축심의 개선 대책 안은 진정으로 칭찬 받아 마땅하다. 더구나 건축심의도면의 간소화, 건축주의 건축심의 참관 허용방침, 건축위원회의 위원들을 공개 모집하는 내용들은 서울시의 건축행정 쇄신의 의지로 까지 보여 진다. 다만 아쉬운 점은 결과물로만 평가하는 건축심의로만 근원적인 문제가 해결되겠느냐하는 점이다. 결과물에 의존 심의하는 방식은 자칫 요령과 편법ㆍ로비 등 또 다른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
따라서 이제는 발주단계부터 창작경쟁에 의해 설계자가 선정되도록 하는 제도의 도입이 시급하다. 지금처럼 발주자의 친분이나 가격에 의한 설계발주제도로는 서울시의 진정한 의지를 실현시키기에 매우 부족하다. 정부도 적격심사라는 명분으로 진입장벽을 만들어 일부 업체들에만 특혜성으로 발주되는 관행적 발주제도를 혁파해야 한다. 젊고 유능한 신진 설계자들에 대한 공정한 참여기회도 보장해야 한다. 또한 건축설계와 공사감리업무는 건축사법에 의해 건축사만이 할 수 있도록 국가로부터 자격이 부여됐음에도 무자격자에 의한 감리행위가 보장되는 현행 주택법과 건설기술관리법 등 감리제도 역시 시장개방과 국제기준에 적합하고 건축사의 창작의도가 구현되도록 대폭 개선돼야 한다.
서울시의 이번 건축심의 개선대책이 우리나라 건축문화를 한 단계 더 발전시키도록 하려면 공무원ㆍ시민ㆍ전문가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와 국민들이 미래에 한 차원 높은 문화적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