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민족주의'는 신채호의 상상력?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85~1919
앙드레 슈미드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中·日 틈바구니서 살길 모색하다 나와
'민족'이란 용어도 1900년에 처음 등장


'한국의 민족주의란 신채호 머릿 속 상상력의 산물이다.' 도발적으로 들리겠지만 신간 '제국 그 사이의 한국 1885~1919'에 따르면 그렇다. '민족'이란 용어도 1900년에서야 신문에 처음 등장했다. 불과 100년을 약간 넘겼을 뿐인데 한국인들은 민족주의적 성향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유엔조차 한국에게 단일민족의 환상에서 깨어나라고 권고하고 나서는 판이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왜 짧은 시간에 퍼졌을까. 캐나타 토론토대학 동양학과장으로 재직중인 저자 앙드레 슈미드(Andre Schmid)는 제목(원제:Korea Between Empires 1895~1919)에 답을 함축시켜 놓았다. 몰락하는 중국과 떠오르는 일본이라는 두 제국의 흥망 가운데서 모색한 살 길이 민족주의였다는 것이다. 과연 한국인들에게 민족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일까. 저자를 따라가 보자. '나의 영혼이 동요하며 용기가 용솟음쳤다!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어올리며, 나는 외쳤다. 바로 이것! 이것이 우리 민족의 본성이다. 그런 것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이토록 위대한 성격과 행적을 우리와 겨룰만한 나라는 없었다. 이렇게 강하고 용감한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의 본성이다!'(176쪽) 신채호 선생이 위인전 을지문덕에 쓴 귀절이다. 저자가 이 대목을 끄집어 강조하는 데에는 단재 조차 이전에는 을지문덕에 대해 인식하지 못했다는 암시가 깔려 있다. 문명개화의 당위성과 민족주의 고양을 위해 당시 지식인들은 선진문물과 자료를 주로 일본에서 구했다. 일본을 통해 알게 된 광개토대왕비가 대표적이다. 저자가 한국의 민족주의와 일본의 제국주의를 같이 맥락에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브루스 커밍스 이후에 가장 한국어를 잘하는 서양인 한국학자로 꼽히는 저자는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 보다 치밀한 자료를 제시하는 데 주력했지만 책은 논란을 야기할 내용도 적지 않게 담고 있다. 가령 '2,000년 동안 규방에 갇혀 지내던 여성'이라는 대목은 고려시대는 물론 임진왜란 전까지 여성들의 지위가 높았다는 점을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을 파악하는 프리즘으로 신문을 택한 것도 논란의 소지가 있다.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조차 '한국 신문기자들이 펜대 한번 움직이는 게 내가 수백마디 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한국인을 움직인다'고 말했다고 하지만 기층 민중에 깔린 정서는 살펴보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민족을 '상상의 공동체, 근대의 산물'로 규정한 베네딕트 앤더스의 시각을 답습했다는 지적도 받을 수 있다. 저자가 다른 각도에서 소개한 18세기초 중국과 간도분쟁은 민족 의식이 아닌 영토주권 만의 문제였을까.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18세기에 형성됐다고 해서 그 이전 시대에는 경제행위가 없었느냐의 질문처럼 단재로 대표되는 지식인들이 창의력만으로 민족을 형성했느냐도 논란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상대 개념인 타자(他者)는 이 책을 어떻게 볼까. 우리보다 7개월 앞서 번역판이 나온 일본에서는 책 소개가 혐한(嫌韓) 사이트에 집중돼 있다. 한국 민족주의의 뿌리는 별게 아니고 일본제국주의 부산물이라는 투로 일본인들은 이 책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옮긴이 서문에 표기준칙을 무시한 채 외국어 단어를 그대로 나열한 점도 거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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