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초'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85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마감했다.
지난달 13일 폐렴 증세로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던 김 전 대통령은 끝내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영욕의 무대를 내려갔다.
김 전 대통령의 인생 역정은 고난과 인내의 연속이었다.
김 전 대통령은 생전 자신을 추운 겨울에도 잎과 줄기의 푸름을 지키는 덩굴풀 '인동초'에 비유며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우리 현대사에 가장 큰 획을 그은 '민주화의 상징'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세계 평화와 인권의 대명사로 불려왔다.
전남 신안 하의도에서 1924년 가난한 소작농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난 그는 목포상고를 졸업한 뒤 스무살이던 1944년 목포상선회사에 취직했고, 해방 직전이던 1945년 봄, 친구 여동생인 첫 아내 차용해를 만나 홍일, 홍업 두 아들을 얻었다.
해방 후 목포일보를 경영하는 등 청년사업가로 성장한 그는 1954년 목포 민의원 선거를 통해 55년 정치 역정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는 내리 세 번의 실패 끝에 1961년 5월 인제 보궐선거에서 승리해 국회의원이 됐지만 사흘 만에 5·16 군사 쿠데타가 발발해 국회가 해산, 의사당 문턱도 밟지 못하고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첫 부인과 사별하고 1962년 이희호 여사를 만나 결혼한 그는 1968년 5월 평생의 라이벌이자 정치적 동지인 김영삼(YS) 전 대통령과의 질긴 인연을 시작했다.
그는 그해 민주당 원내총무 경선에 출마해 YS와 첫 번째 대결을 벌여 패했지만 두번째 대결인 1970년 대선 후보 지명전에서 '40대 기수론'을 먼저 꺼내든 김영삼 후보를 결선에서 뒤집고 일약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에 올랐다.
이듬해 대선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맞붙은 그는 장기독재를 경고하며 분전했지만, 근소한 차이로 패배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총선 지원유세중 교통사고를 위장한 테러를 당해 지금까지 한쪽 발을 절게 됐고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이후, 치료를 위해 일본에 건너갔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뒤 유신 반대 운동을 벌였다.
1973년 8월, 도쿄 그랜드팔레스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괴한들에게 납치돼 현해탄에 수장될뻔 했다가 미국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김 전 대통령은 그 유명한 '김대중 납치 사건'을 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만 구해 강제 귀국했다.
이후 가택연금을 되풀이하던 김 전 대통령은 1979년 10·26 사건 후 잠시 '서울의 봄'으로 정치 해방기를 맞았으나 1980년 광주를 피로 진압한 신군부 세력에 의해 '내란 음모' 혐의로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다행히 전세계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이 전개됐고, 덕분에 그는 형 집행 정지를 받은 뒤 1982년 미국으로 망명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85년 2월 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귀국을 단행했지만 김포공항에서 강제 연행돼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급조한 신한민주당 돌풍에 힘입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벌여 1987년 6월 항쟁을 촉발시켰고 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통과시켰다.
6·29 선언 한 달 전인 1987년 5월 사면복권된 그는 13대 대선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와의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 평민당을 창당한 뒤 두번째 대권 도전에 나섰다.
하지만 야권의 분열은 여당인 민주정의당 노태우 후보의 승리를 가져왔고, 이로 인해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야당 분열의 책임자'라는 오명을 들어야 했다. 이후 3당 합당으로 여당후보가 된 김영삼씨와의 대결로 진행된 14대 대선에서는 지역주의의 두꺼운 벽을 넘지 못하고 또 한번 고배를 마셨다.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그는 1995년 7월 정계에 복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그는 1997년 11월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DJP 연합' 결성에 성공, 마침내 15대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 때의 승리는 36년간 계속됐던 보수정당 집권에 마침표를 찍은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평가를 받는다.
자민련과 공동정부를 구성한 그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그 앞을 기다리는 것은 IMF 사태라는 초유의 경제적 위기였다.
하지만 그는 취임과 함께 적극적인 외국인 투자 유치, 재벌간 빅딜 등의 과감한 경제개혁을 통해 2001년 8월 당초 예정보다 3년 앞당겨 IMF체제에서 조기졸업하는 성과를 냈다.
그는 남북 통일에 대한 오랜 염원을 재임 시절 최대 과제로 삼고 '햇볕 정책'이란 대안을 통해 분단 이후 2000년 6월 첫 남북 정상 회담을 이끌어냈다.
특히 그해 10월, 그는 민주주의와 인권신장 및 한반도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21세기 첫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한국아이닷컴 뉴스부 reporter@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