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나의 인생] 13. 출판인생의 5가지 지침

요즘은 시대가 많이 변해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가 있는 5월과 12월의 어린이책 판매특수는 거의 사라진 듯하다. 하지만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5월과 12월은 아동물을 내는 출판사라면 연중 가장 기다렸던 대목이었다. 계획보다는 늦었지만 그래도 12월16일 책이 나와 인천 동인서적에 처음 배본을 했다. 그 다음날부터 광화문~종로지역에 있는 서점에 책을 갖다 주고, 명동ㆍ을지로ㆍ서대문ㆍ신촌ㆍ영등포 등 다른 서점에도 책을 보냈다. 배본량은 서점 규모별로 큰 곳에는 3권씩 넣은 코스모스 세트 10질과 낱권10부씩, 작은 서점이라면 세트 5질과 낱권 각 5권씩을 보냈다. 서울을 제외한 지방서점에는 라면 박스에 책을 싸서 열차 화물편으로 전달했는데 부산의 중앙, 울산의 태화, 대구의 문화서적, 삼신서적 등 선수금을 받은 서점에는 신경을 써서 우선적으로 보냈다. 출판사만 쓰는 사무실과 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문창제책사 전화를 임시 연락처로 삼고 미처 배본하지 못한 책은 제본소 한쪽 구석에 보관했다. 아침이면 제본소로 가서 들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많은 양의 책을 양손에 들고 서점으로 향했다. 책이 너무 무거워 장갑을 껴도 손가락이 아팠고, 한참 걷다 보면 두 팔은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그나마 날씨가 좋은 날은 괜찮았지만 눈이나 진눈깨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책이 젖을까봐 길바닥에 내려놓을 수 없어 진땀을 흘렸다. 힘이 빠져 더 이상 들고 갈 수가 없으면 발등 위에 책을 얹고 잠시 쉬었다가 들고 가곤 했다. 교통편은 주로 버스를 이용했는데 만원 버스에 무거운 책 짐을 들고 타려면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버스에는 요금을 받는 차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짐을 든 나를 가급적이면 태워 주지 않으려고 했다. 나의 입장에서도 미안하고 눈치가 보이는 일이었지만 주머니 사정상 버스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제본소와 서점을 오가고 나면 온몸이 파김치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책을 받은 후 많은 서점주들은 매절로 미리 계산해 주었다. 형편이 여유롭지 못하다는 걸 알고 편의를 봐준 것이다. 그 때 나는 평소 인간관계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새삼 깨달았다. 처음에는 출판을 하지 말라고 말렸던 사람들도 나온 책을 보고는 칭찬과 격려를 해줘 큰 힘이 됐다. 책을 배본 한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아 덕수서점과 송원서점에서는 모두 팔렸다며 50부씩, 다음날에는 종로서적과 서울서점, 신생백화점 등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4종의 책을 2,000부씩 찍은 초판은 15일 만에 거의 동이 났고, 12월 30일에는 종로서적과 양우당, 동성서점 등에서 수금을 할 수 있었다. 그때까지 초판을 거래한 서점은 서울 35곳, 지방 32곳 등 모두 67개 서점으로 첫번째 낸 작품치고는 엄청나게 많은 거래처를 확보했다. 12월 31일, 1973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 날은 낮에는 서울 시내 서점을 바쁘게 돌아보고 저녁에 가까운 출판계 친구들을 만나 망년의 술잔을 나누었다. 모두들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는 덕담을 해주면서 출판 입문을 마음으로 축하해 주었다. 나는 그날 밤 나눈 이야기와 평소 갖고 있던 출판에 대한 생각을 요약해서 수첩에 기록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나의 출판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본 지침이 되었다. 첫째, 망한 출판사가 많다. 왜 망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보자. 둘째, 처음 출판을 시작할 때 가졌던 각오를 잊지 말자. 셋째, 발간한 책이 잘 팔린다고 안주하지 말고 끊임없이 신간을 개발하자. 넷째, 돈이 될 만하다고 아무 책이나 내지 말고 어린이책만 전념하자. 다섯째, 할부판매용 전집은 내지 말고 서점용 단행본만 내자. <아시아태평양출판협회장ㆍ전(前)대한출판문화협회장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