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우리 집 텔레비전은 '있다 없다' 했다. 돈이 궁하면 가장 먼저 파는 물건이 텔레비전이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돌아와 텔레비전이 없어진 방을 보면 맥이 탁 풀리곤 했다. 그 대신 텔레비전이 있는 한 시청제한은 없었다. 내일 시험이 있건 어린이가 보기에 부적절하건 부모님은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가장 좋아했던 프로그램은 당연히 '명화극장'이었다. 굵고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영화평론가 정영일씨의 시니컬한 예고 프로그램조차 정말 좋아했다. 지금도 생생한 명화극장 시그널과 타이틀을 보고 있으면 심장이 그야말로 '바운스바운스'됐다.
그때 모든 영화를 다 좋아했지만 필자를 가장 행복하게 한 건 뮤지컬 영화였다. 흥겨운 노래와 춤, 꿈처럼 환상적인 화면, 무엇보다 해피엔딩이 보장된 뮤지컬 영화를 보고 있으면 단칸방에 살고 있다는 것도, 며칠 후면 없어질 텔레비전이라는 것도 잊을 수 있었다. '왕과 나' '사운드 오브 뮤직' '남태평양' '비바 라스베가스' '7인의 신부' '파리의 미국인' 등을 보면서 지금의 필자가 만들어졌다. 그 중 단연 으뜸은 '사랑은 비를 타고(1952년작)'다.
비 오는 거리에서 진 켈리가 우산과 함께 춤추는 장면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비를 좋아하는 이유고 수백번은 상상 속에서 따라 춰본 명장면이다. 켈리의 이 장면 못지않게 도널드 오코너의 춤도 필자를 사로잡았다. 영화 촬영장의 각종 소품을 이용한 오코너의 춤과 노래 '메이크 엠 러프(Make em laugh)'는 즐거움과 놀라움의 끝이었다. 켈리나 오코너가 그렇게 춤을 잘 추기까지 얼마나 노력했을까. 특히 진 켈리는 이 영화의 감독까지 했으니 그 뛰어난 재능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여주인공인 데비 레이놀즈는 또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특히 어려운 환경에도 열심히 노력해서 행복해지는 여주인공의 모습은 당시 어렸던 필자에게도 엄청난 희망을 줬다.
요즘 이 영화를 보면 다른 각도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다름 아닌 '격변기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한 것이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넘어가는 1930년대 할리우드가 배경인 이 영화를 보면서 도도한 역사의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면 한순간에 도태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아직도 이 영화를 DVD로 본다. 노란 비옷을 입은 세 주인공의 발랄한 춤으로 시작되는 첫 장면만 봐도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충분히 나이가 들었지만 비 오는 날, 거리의 턱에 고인 빗물에 거침없이 발을 튕겨보면 어느 새 마음속에는 켈리가 부르는 노래가 들리곤 한다.
조휴정 PD(KBS1 라디오 '빅데이터로 보는 세상'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