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은 어떻게 대항해 시대를 열고 세계의 바다 위에서 군림할 수 있었을까? 저자는 대포와 선박 기술의 진보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1628년에 건조된 스웨덴 전함 바사(vasa)호(위)와 영국 에든버러 성의 대포 몽 메그. /사진제공=미지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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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영국인과 프랑스인을 서로 사랑하게 하랴? 누가 제노바 사람과 아라곤 사람을 합심하게 하랴? 누가 헝가리인, 보헤미아인과 독일인을 화해시키랴? "(교황 피우스 2세)
중세 유럽은 군사적 측면에서 취약했다. 인구도 많지 않은데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15세기에 이르러서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투르크의 공격으로 두려움에 떨었으며 결국 세르비아, 네그로폰테, 알바니아가 잇따라 투르크의 침략을 당했다.
그러던 15세기 후반 무렵부터 유럽은 동양을 서서히 압도해나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유럽은 언제부터, 또 어떻게 세계의 우위에 서게 되었을까?
유럽 경제와 역사를 연구한 대표적인 이탈리아의 경제사학자 카를로 M. 치폴라는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고민해온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대포와 범선'이라는 소재에 주목한다. 효율적인 대포로 무장한 범선을 활용해 대항해 시대를 열어젖히면서 유럽이 세계 진출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동서양을 망라하는 수 많은 역사적 사료를 바탕으로 이같은 주장을 분석해낸다. 책 분량의 3분의 1이상을 각주에 할애할 정도로 다양한 사료를 총동원한 책은 '대포와 선박 기술의 진보를 통해 살펴본 유럽 발전사'라고도 할 수 있다.
대포와 범선은 인력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던 낡은 시대의 패러다임을 깼다. 즉 항해와 전쟁에서 인력의 시대를 벗어나 기계의 시대를 열게 된 계기라는 뜻이다. 책은 대포와 범선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인원이 막대한 양의 물리적 에너지를 제어할 수 있게 만든 '경제적인' 고안물이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군사적으로나 기술적으로 가장 후진적이었던 영국에서 기술상의 주요한 혁신을 이뤘다는 점이 특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말한다. 기술적으로 낙후돼 있던 영국은 수입에만 의존하는 데서 벗어나 직접 포신이 길고 구경이 작은 대포를 개발함으로써 패러다임 전환의 일등공신이 된 것이다.
유럽이 이처럼 기술을 개발하는 동안 동양, 특히 화약을 만든 중국이 우수한 대포를 개발하지 못한 이유는 뭘까. 이 질문은 '중국이 왜 산업화하지 못했는가?'라고 묻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는 단순히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중국이 가지고 있던 문화적 자부심과 가치관의 문제였으며 내부반란을 염려해 대포 기술을 발전시키지 않았던 조정과 이민족의 문명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자존심이 변화의 앞길을 막은 것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조선 수군은 조총은 없었지만 대신 배에 대포를 많이 실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 수군은 조총은 많았지만 대포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순신이 눈부신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저자는 유럽의 기술 발전이 결과적으로 철학과 사회적ㆍ인간적 관계보다 기술을 우위에 두는 사회라는 좋지 않은 유산을 남겼다고 지적한다. 그의 주장에 동의하건 않건 유럽인이 해상을 지배했던 '바스쿠 다 가마의 시대'는 끝났다. 책은 새로운 시대를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낡은 패러다임을 깰 수 있는 새로운 '대포와 범선'이 무엇일지 생각해보라고 조언한다. 1만 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