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承壽(대구효성카톨릭대 산업미술연구소장)「세금은 다자인의 대상이다」 라고 말한다면 금속세공을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하겠지만 「細金」아닌 「稅金」을 디자인하는 일은 필요하다. 稅金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형태로 문제가 돌출되거나 잠재되어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아무도 세금을 충분히(?) 내는 일을 달가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금을 내지 않을 수는 없다.
이럴바에야 좀더 긍정적으로 기분좋게 적극적으로 세금을 내도록 할 수는 없을까? 탈세(脫稅) 보다는 협세(協稅)쪽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을까? 모두가 복지국가를 외치면서도 납세에는 인색하다면 이치에 맞지않는다. 세금은 정당하게 징수되고 성실하게 납부되어야 한다. 봉급 생활자만 손해를 보고 있다든가, 도대체 그 많은 세금이 어디에 쓰이는지 모르겠다든가 하는 세간의 자조적인 여론은 불식되어야 한다.
행정당국은 세금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미지를 명확하게 「디자인」해서 납세자인 국민들에게 알릴 필요가 있다. 세금은 징수되는 것이 아니라 모으는 것이며, 정부를 위해서 모으는 것이 아니라 국민모두가 살기에 필요한 이러저러한 일을 하기위해 행정당국이 대신하여 창구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릴 필요가 있다.
이런 것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으며 새삼스럽게 알린다 한들 세금이 더 걷히거나 탈세가 줄어들겠느냐, 그리고 각종 홍보물을 통해서 연례적으로 납세에 대한 홍보를 적극적으로 잘해오고 있다고도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이러한 대답은 마치 어떠한 상품이 잘 팔리지 않고 있는데 대해서 색깔과 모양을 새롭게 다듬고 가격을 조정한다고해서 특별히 매출이 달라지겠느냐고 묻는 것과도 같다.
납세고지서나 체납독촉장 보다는 오히려 지난해의 납세액에대한 사용명세서를 국민 앞으로 보내주면 어떨까.
『작년에 내주신 귀하의 돈은 이러저러한 용도로 쓰였습니다. 납기에 맞추어 보내주셔서 더욱 고마웠습니다』라고 쓰여진 예쁜 꽃이라도 그려진 카드가 주부들 앞으로 보내진다면 어떨까.
부문 별로나마 목적세로 전환해 보는 것도 좋겠다. 납세자가 내고 싶어하는 분야에 타당한 액수를 내게한다면 납세불감증이나 불신감을 완화시키는데 도움이 되지않을까.
「디자인」한다는 것은 장식적 미화라든가 멋을 내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의 속마음을 읽는 일이며 마음을 열게하는 수단이다. 날이 갈수록 「디자인」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있다. 디자인은 소위 디자이너의 일만은 아니며 모든 분야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일이다.
바꿔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각자가 디자이너라고 말 할 수가 있다. 직업적 디자이너와 기업이 만든 디자인이 시장에서 유통되는 세상이 된지 오래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그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디자이너는 대중이다.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서 그 자급능력은 저하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생산구조의 변화 요인에 의하여 행정가와 기업가와 디자이너에게 위탁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실행을 대행시킨 것과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일상의 환경, 정보, 상품들은 기업과 시행청이라는 대행인들이 마련해 놓는다. 일단 만들어진 다음에는 싫든 좋든간에 우리는 그것들 속에 있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 있어서나 물건, 환경간의 관계에 있어서나 그 요구와 응답 사이에 간격이 있거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할때에는 여러가지의 스트레스가 발생한다.
더욱이 이러한 현상이 집단적, 지속적으로 누적 되었을 경우 일반의 상상을 초월하는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게된다. 공공의 시설과 커뮤니케이션으로 대변되는 사회장치들은 그 사회와 인간의 성장과 변화에 따른 신진대사가 가장 민감하게 집약되는 곳이다. 자칫 일상에 지치고 왜곡되기 쉬운 시민습관을 쾌적한 곳으로 인도함으로써 사회적 복원력을 제공하는 다분히 정치적 매체이다. 삶의 질과 계획의 수준을 높여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이다.
이런 유용한 사회장치들을 만드는데 세금이 쓰여지고, 그래서 세금을 내는 일이 즐거워질수 있는 것을 가리켜 「디자인」이라고 부를수 있을때 비로소 사회는 살만하게 「디자인」되었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