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기관 외국어 남발 '눈총'

과기부총리 대국민 신년사 영어문구 수두룩
과기원은 올부터 학교명칭 'KAIST'로 통일
한글학회등 "글로벌화도 좋지만 균형 필요"

“국가 R&D ‘Total Roadmap’을 마련하고 ‘Top Brand Project’에 착수…(중략)…‘Techno Peace Corps’ ‘Techno Doctor’ ‘ReSeat’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마치 외국계 기업의 문서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는 이 문장은 다름 아닌 김우식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의 2008년 대국민 신년사다. 한글 보존에 앞장서야 할 정부 부처가 이처럼 영어 일색의 공식문서를 대국민 메시지로 내보내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여기에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과학인재 양성소인 ‘한국과학기술원(KAIST)’조차 새해부터는 한글 표기 없이 ‘KAIST’라는 영문 이름만 사용하겠다고 선언해 논란이 일고 있다. 3일 과학기술부에 따르면 신년사에 표기된 ‘Total Roadmap’ ‘Top Brand Project’ ‘ReSeat’ 등은 지난 1~2년간 과기부가 야심차게 벌여왔던 대표적인 과학기술 정책. ‘Total Roadmap’ 은 국가 연구개발 투자를 특정 분야별로 구분, 우선순위에 따라 투자액을 다르게 배분하는 투자의 큰 밑그림이다. ‘Top Brand Project’ 는 정부 출연 연구기관마다 대표적 연구 분야를 설정하고 집중적으로 키우는 사업을, ‘ReSeat’은 은퇴 과학자들에게 재취업을 알선해주는 사업을 뜻한다. 이와 관련 한글학회ㆍ국립국어원 등 한글 관련 단체와 연구기관들은 국민을 상대로 하는 정부 정책이 오직 영어로만 표기되고 있다는 데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바우처(voucherㆍ정부가 발행하는 공공서비스 구매권) 등 한글 표기가 어려운 표현에 한해 최소화해 사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애초부터 정책 이름을 영어로만 표기하려는 내부 인식이 팽배해 있다는 지적이다. 국립국어원의 한 관계자는 “‘Roadmap’이나 ‘Top Brand’ 등의 표현은 각각 청사진ㆍ으뜸 등으로 충분히 바꿔 표기할 수 있는 것들”이라며 “처음부터 한글 표기를 중심에 놓고 정책 이름을 발굴하면 이런 일이 없을 텐데 요즘은 무조건 영문 이름부터 생각해낸다”고 우려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 산하 기관인 한국과학기술원조차 이날 보도자료를 내고 “전체 학과장회의 등을 거쳐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학교명칭을 영문 ‘KAIST’로 통일한다”고 밝혀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원 측은 “꼭 필요한 경우 외에는 한글 명칭 ‘한국과학기술원’도 사용하지 않는다”며 “일반 국민들도 그렇게 불러주기를 요청한다”고 덧붙였다. 한글학회의 한 관계자는 “정부 출자 공영방송인 교육방송이 ‘EBS’라는 영문명만을 사용하겠다고 해 논란이 된 게 엊그제인데 카이스트마저 이 같은 결정을 내려 상당히 아쉽다”며 “아무리 글로벌화가 중요하더라도 영문명만을 쓰겠다는 건 균형감각을 상실한 결정”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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