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말에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는 말이 있다.
요즘 미국증시가 꼬리를 물고 터지는 회계부정 사건으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는 중에 한국이 여유롭게 사태의 진전을 관망하면서 증시 차별화를 논할 수 있는 이유가 뭘까.
이는 한국이 일찍이 IMF위기 극복과정에서 기업회계와 지배구조 개혁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기 때문일 것이다.
증시의 신뢰위기가 달러가치 하락과 경제불안으로 파급된 미국의 상황은 투명성 부족과 지배구조의 취약성이 얼마나 심각한 경제문제를 촉발할 수 있는지를 새삼 입증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한국의 경제위기도 기업들의 과잉투자ㆍ과다차입 등을 막지 못했던 지배구조 부실에서 발생했다.
그동안 국내에도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장치들이 도입됐고 기업 행태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주주권익 침해에 대한 투자자들의 인내심도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경영자가 시장반응 여하에 따라 경영판단을 뒤집는 것도 이제는 낯설지 않다.
그러나 아직 우리 기업들의 투명성에 대해서는 일말의 불안감이 상존하고 '코리아 디스카운트'도 엄연한 현실로 남아 있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실회계와 경영자의 부정행위로 얼룩진 미국기업이 전체 상장기업의 5분의1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나돌면서 글로벌 스탠더드로 여겨지던 미국의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믿음마저 깨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회계부정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활발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그 배경에는 이사회, 특히 감사위원회의 비효율성 때문에 분식이 가능했다는 인식이 있다.
엔론의 경우 사외이사가 하나같이 켄 레이 전 최고경영자(CEO)에 의해 지명됐다고 한다.
'독립이사'들의 독립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교훈을 바탕으로 국내기업의 지배구조 개선은 세 방향에서 추진돼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장기적 성패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지배구조라는 점을 경영자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다.
지난 90년대 초 미국에서 본격적인 지배구조 혁신이 시작됐던 데는 지배구조의 중요성에 대한 CEO들의 달라진 인식이 있었다. 경영자들의 인식전환을 위해 증권업계, 재계, CEO 단체 등이 나서는 게 효과적일 수도 있다.
또 경영자들이 지배구조 개선에 미온적이라면 시장규율이 작동돼야 한다. 시장의 압력은 직접 이해당사자인 주주로부터 나와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소액주주들이 무임승차자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외부 대주주에 해당되는 기관들의 감시기능이 중요하다.
미국의 경우 캘리포니아연금기금 같은 대형 기관의 활동이 두드러지며 이번 엔론사태 이후에도 수개의 공적연금기금들이 투자은행들로 하여금 일상적 영업과정에서 기업들의 회계관행이나 지배구조를 심사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다.
한국의 경우 공적연금이나 투신 등의 기관들이 사외이사 후보 추천, 주주제안권 활용, 주총의결권 행사 등 활동투자자(active investor)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면 지배구조 개선에 큰 진전을 기대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90년대 들어 어려워진 적대적 인수ㆍ합병이 경영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초래한 주요 원인이 돼 연방 및 각주의 법을 개정해 적대적 인수를 다시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피라미드 소유구조로 인한 높은 내부 지분율 등을 감안할 때 적대적 인수를 통한 증시의 규율기능은 기대하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지배구조 개선을 경영자의 자발적 노력이나 시장압력에만 기댈 수 없으며 제도적 뒷받침이 따라야 한다.
지배구조 관련 제도는 시장경제의 게임규칙에 해당되며 운전자가 지켜야 하는 교통규칙과 마찬가지다.
이번의 회계부정 사건들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이사들 때문에 발생했다는 전제하에 뉴욕증권거래소는 상장기업 이사회가 윤리규정을 공표하고 이사들의 업적을 매년 평가하며 모든 기업에서 사외이사를 과반수로 두고 있다.
또 이들의 독립성 기준을 강화해 사외이사들만의 정기모임을 의무화하는 등 상장규정 개정안을 논의하고 있다. 이런 내용들은 상당부분 우리의 제도나 지배구조 모범규준의 권고보다 강화된 것들이다.
지배구조가 부실하고 투자자 보호가 미흡한 나라는 경제덩치에 비해 증시규모가 작고 자본조달이 어렵기 마련이다.
이는 결국 기업의 자본비용을 증가시키고 기업의 성장과 경쟁력을 제한하게 된다.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해외에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지배구조와 투자자보호의 국제비교에 관한 연구들은 한결같이 이 같은 사항을 경고하고 있다는 점을 중시해야 한다.
/정광선<중앙대 경영학과 교수ㆍ기업지배구조지원센터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