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스토리] 최초 온라인 증권사 '아옥양체점'

1928년 경성 명치정의 '경성전화취인소' 영업 광경


"모시모시~ 센고쿠 야로, 돗다!"

1928년 4월18일. 경성 명치정의 한 주식중매점에 고객의 주문 전화가 쇄도했다. 긴박한 상황과는 달리 중매점 내부는 의외로 조용했다. 이 증권사에 객장이 없었기 때문. 특이하게도 이 중매점은 고객의 주문을 전화로만 받았다. 85년 전인 이날부터 현재의 온라인 전업 증권사와도 같은 전화취인소인 아옥양체점(兒玉兩替店)이 처음으로 영업을 시작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채만식의 소설 '탁류'에 묘사된 미두장은 대부분 오프라인 매매 광경이다. 미두장이나 중매점에 나온 미두꾼들은 '요비코(呼子)'로부터 시세를 전달받은 후 주문표를 작성한다. 그리고 중매점에서 파견 나온 시장대리인 '바다지(場立)'에게 주문표를 건네주면 '딱딱이꾼'의 신호에 의해 매매가 붙고 기록원인 '다카바'에 의해 시세가 정해지는 형식이었다.

1920년대 들어 전화기 보급이 늘어나자 객장에 직접 나가지 않고 전화로 주문을 내는 '오오대(大手ㆍ큰손)'들이 생겨났다. 지방 전화주문 건수가 늘어나며 주문 속도가 중요해지자 거래소 근처로 이전 개업하며 '경성전화취인소'를 개업한 이가 아옥덕차(兒玉德次)라는 일본인이었다. 당시 중매점 인가를 받던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회사령'에 의해 대부분 일본인들이었고 1920년 경성주식현물취인소가 생기면서 증권붐이 일자 일본인들의 중매점 신청 건수는 부쩍 늘어났다. 때마침 회사령이 폐지되자 조선인 중에서도 중매점을 개업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1921년 김윤수와 김응룡이 경성에, 1923년 장최근과 정상호가 인천에 각각 중매점을 냈다. 이즈음 일본 가고시마 출신의 아옥덕차도 경성 본정의 시노사키빌딩 2층에서 중매점 개업을 했고 이후 거래소 바로 앞의 명치정2정목(현 충무로2가)으로 이전해 '아옥양체점'이라는 전화전문취인점을 새로 개업했다. 1929년 발간된 '조선은행회사조합요록'에는 '아옥양체점'은 자본금 2,500원의 합자회사로 기록돼 있다. 업종은 '금융신탁', 설립목적은 '전화매매금융 및 일반신탁'으로 '주식중매업'과는 분명히 구분이 됐다. 이후 분초를 다투는 증권매매에서 전화는 그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엄밀한 의미의 온라인 주식매매는 '증권사 전자통신법 수탁 허용' 등을 담은 1997년의 증권거래법 개정안 이후다. PC와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의 보급이 늘어나며 주식투자인구도 급속히 증가했다. 최근 들어서는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모바일트레이딩시스템(MTS)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하나대투증권의 11월 주문 매체별 거래대금 자료를 보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인 '스마트하나HT'의 유가증권시장 거래 비중이 15.1%, 코스닥시장의 거래 비중은 21.2%에 달하고 있다. 이 비중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85년 전 거미줄 같은 전화선이 전봇대를 장식할 때 '전화전문증권사'가 나타난 것처럼 지금은 스마트폰의 보급이 늘어날수록 MTS는 최첨단의 무선 주문매체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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