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스마가 직장 잡았으면 톱 해봐야지…"
동기보다 늦은 출발 마음 다지며 채찍질
본부장시절 배짱 담판으로 시금고 수성도
"앞장서 힘든 길, 가시덤불 헤쳐 나갈 터"
"명예는 상사에게, 영광은 부하에게, 책임은 내가 진다."
박인규(사진) DGB(대구은행)금융그룹 회장 겸 대구은행장은 군 내무반에 적혀 있을 법한 훈시를 가슴속에 품고 산다. 군인이 꿈이었고 학생군사교육단(ROTC) 출신으로 복무하면서 얻었던 경험이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회생활이라는 게 이 글귀와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명예와 영광을 상사와 부하에게 전달하면 결국 이는 내게 다시 돌아온다. 책임은 내가 진다고 하면 주위에서 나누려고 다가온다. 이런 마인드를 갖고 일을 해왔다"고 말했다. 주인정신을 갖고 일하는 자세, 그러면서도 상하 간 직원들을 아우를 줄 아는 그의 삶의 태도가 묻어나는 말이다.
"국방부 시계는 거꾸로 매달아놓아도 가지만 이왕 군생활을 할 바엔 멋있고 적극적으로 하자"고 다짐한 박 회장은 학군단 출신 소대장으로 수도기계화사단 맹호부대에서 복무했다. 의욕이 넘치던 그는 매년 부대에서 구보·사격 등 16개 기본공통과목을 테스트해 뽑는 최우수 맹호 소대의 소대장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소대원들에게 압력을 넣지 않고 자발적 회의를 통해 참여 여부를 정하라고 했다. "원한다면 도전하고 도전한다면 죽을 힘을 다해 테스트를 한 뒤 맹호 소대라는 명예와 더불어 부상인 컬러텔레비전을 갖자"고 독려한 것이다.
소대원들은 젖먹던 힘까지 다해가며 테스트에 임했고 결국 바람이던 맹호 소대의 영광을 얻었다. 날아갈 듯 기뻤다. 그럼에도 수상한 컬러텔레비전을 대대장에게 주겠다고 했다. 공을 상사에게 돌린 것. 물론 대대장은 받지 않았다. 사병들과 사무실에서 한데 어울려 컬러텔레비전을 봤다고 한다. 득은 모두 나눠 가진 셈이다.
군생활조차 적극적으로 하자 그를 어여쁘게 여긴 대대장이 소집해제된 박 회장을 찾아가 다시 '짬밥'을 먹지 않겠느냐고 권유하는 일까지 있었다. "대구은행에 취업한 지 한 달도 안 돼 대대장이 제가 근무하는 지점에 찾아왔습니다. 놀라서 '맹호'라고 하며 거수경례를 했습니다. 대대장은 저를 데리러 왔다고 했습니다. 저승사자가 찾아온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소집해제됐다가 6개월 이내에 부대에서 소집명령을 내주면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한 제의지만 사양했습니다."
재입대를 거절하고 은행에 남았지만 뱅커로서의 생활은 적응이 안 됐다. 책상에만 앉아 있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았다. 군 시절 허구한 날 구보를 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8년 먼저 입사한 상고 출신 동기 밑에서 일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체질에 맞는 건설회사로 이직할 생각을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지난 1979년 2차 석유파동이 일어나자 이마저도 녹록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을 방황했다. 더 이상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마음을 다잡으며 생각했다. "대리, 차장 승진은 당연히 네(상고 동기)가 빠르겠지. 그런데 지점장쯤 되면 따라가지 않겠나. 본부 부장 정도 되면 너희보다 앞서 가지 않겠나."
그는 그러면서도 정상을 꿈꿨다. "머스마새끼가 말이야. 직장을 잡았으면 한번은 톱을 해봐야지."
정상을 꿈꿨고 결국 이뤄냈지만 그 과정에서 갖은 난관이 있었다. 그는 본부장 시절 포항시금고 수성을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로 꼽았다. "당시 대형 시중은행에서 포항시금고를 빼앗아가겠다고 선언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만히 있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당장 그 은행의 수석부행장을 만났습니다. 당신의 은행 정도 되면 지역의 조그만 시금고를 차지하러 올 것이 아니라 해외 가서 외화벌이를 하면서 파이를 키우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금융사가 아니라 우리나라 금융, 경제산업 발전을 위해 덩치를 키우라고 말이죠."
박 회장은 "교육만이 유일한 유산"이라고 되뇌던 아버지가 없었다면 은행에서 '별 네개(은행장)'를 달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지금의 명예와 영광을 아버지에게 돌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과수원집 아들로 태어나 부유하게 자랐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유산을 물려줄 생각이 없으셨죠. 아버지는 늘 돈은 하나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공부로 물려주겠다고 했죠. 7남매 각자 능력대로 공부하면 대학까지는 보내준다고 했습니다. 결혼, 대학원 등 그 이상은 알아서 하라고 하셨죠. 아버지의 강한 교육열, 그 후광 덕분에 일찍이 대구로 나와 유학을 했고 남보다 빠르게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가슴속에 남아 있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리더십도 돋보인다.
"은행장이 되고 첫 임원회의 때 부행장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부하는 앞에 있는 9명의 부행장뿐이다. 본부장, 부장, 지점장은 내 새끼가 아니다. 본부장은 부행장이, 부장은 본부장이 장악하도록 만들라. 나는 범위와 기한 같은 방향성만 주겠다. 머리를 싸매고 짜내서 창의를 발휘해 일을 진행하라고 주문했습니다."
박 회장은 거칠어 보이지만 자신의 용인술이 서서히 성과를 보이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휴대폰을 꺼내 '미스터 점프(Mr. Jump)' 캐리커처가 그려진 사진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우리 앞에는 늘 장애물이 있습니다. 은행 설립 이래 지난 46년간 한번도 쉬운 해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대구은행은 공적자금을 한번도 받지 않았습니다. 선배들은 적자 한번 내지 않았고요. 우리 앞에 난국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팔을 걷어붙이고 장애물을 넘어야 합니다. 은행장인 내가 앞서 힘든 길을, 가시덤불을 헤쳐가려고 합니다. 직원들이 안 따라오겠습니까. 요즘은 이런 태도가 직원들에게 먹혀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자행 출신 행장 11명 배출… 공적자금 안받고도 환란 이겨내 ■ 대구은행의 남다른 DNA 대구은행에는 항상 '유일'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자행 출신 은행장을 11명이나 배출해낸 은행은 시중은행 통틀어 대구은행뿐이다. 외환위기 시절 공적자금을 받지 않고 컸고 타 은행과 인수합병(M&A)으로 성장하지 않은 곳도 대구은행이 유일하다. 박인규 DGB금융그룹 회장 겸 대구은행장의 대구은행에 대한 자부심도 유일한 타이틀을 여럿 보유하고 있는 데서 비롯됐다. 대구은행은 지난 1967년 설립 이래 47년 동안 총 11명의 자행 출신 은행장을 배출했다. '대구은행 순혈주의'라는 말이 생겨난 것도 이 때문이다. 사정이 이러니 대구은행 직원들의 DNA에는 노력만 하면 누구나 최고경영자(CEO)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다. 박 회장은 자행 출신 대구은행장 배출이 지방은행 본연의 취지와도 걸맞다고 평가했다. 그는 "사회 초년기 시절 성공해서 만나자고 약속했던 거래처 사람들과 은행장, 사장이 돼 조우한 경험도 종종 있다. 수십년간 이어져온 거래는 단순한 금융거래를 넘어 대를 잇는 평생고객을 만들어준다. 지역 실정에 정통한 사람이 은행장 자리에 오르면 주주와의 관계를 끈끈히 할 수 있고 결국 지역경제에 생기가 도는 선순환 구조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지배구조가 튼실하니 누가 은행장이 돼도 무리하게 일을 추진해 부실·비리를 낳는 법이 없다. 박 회장은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사과 중 빨간 것만 먹어도 배부르다. 설익은 건 동생(차기 행장) 먹게 놓아둔다. 배고프다고 형님(현 행장)이 빨간 것 설익은 것 다 먹으면 동생이 배가 고파 무리를 하게 된다. 부실대출이 일어나고 비리가 생기고 그렇게 조직이 와해된다. 그런 측면에서 대구은행은 다른 은행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이 같은 자부심을 기반으로 DGB금융 외형 확대로 한 단계 더 도약하겠다는 심산이다. 그는 "은행만으로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 수익구조를 다각화해야 한다. DGB금융의 자금여력은 충분하다. 돈가방을 들고 백화점 쇼핑을 나온 심정이다. 다만 백화점 물건 포장은 예쁘지만 속을 들여다볼 수 없듯 보험·증권·자산운용·캐피털 모두 같은 금융업이지만 현재 분석할 능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다. 컨설팅을 받고 있다. 백화점 물건을 반품할 수 있듯 최근 일부 금융사 입찰 불참도 마찬가지다. 필요하다면 흡수(M&A)하든지 새로 창업을 하든지 할 것"이라고 말했다. |
●박인규 회장은 △1954년 경상북도 경산 △1972년 대구상업고 △1977년 영남대 무역학 △1979년 대구은행 입행 △2001년 대구은행 서울분실장 △2006년 대구은행 서울영업부장 △2007년 대구은행 경북1본부 본부장 △2009년 대구은행 전략금융본부 부행장보 △2010년 대구은행 마케팅그룹장(부행장) △2010년 대구은행 공공금융본부장 △2011년 대구은행 지원그룹장 △2011년 대구은행 영업지원본부장 △2012년 대경티엠에스 대표이사 △2014년 DGB금융그룹 회장 겸 대구은행장 |
사진=이호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