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수도 워싱턴 DC가 성난 얼굴을 짓고 있다. 연초의 진눈깨비 사태로 허벅지 굵기의 가로수 가지들이 꺾인채 시내 곳곳에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다. 또 꺾인 가지들이 전선을 건드려 근교 몽고메리 카운터의 주민20%가 사흘 째 계속 정전으로 떨고 있다. 백화점과 극장마다 추위를 피하려는 주민들로 가득하고 호텔도 덩달아 성업이다.토요일 저녁 KAL기편으로 서울 김포공항을 떠나면 같은 토요일 저녁(현지시간) 워싱턴 공항에 닿을 수 있다. 경유지로 시카고를 택할 경우 워싱턴에서 수십리 밖에 떨어진 댈러스 국제 공항대신 DC시내에 위치한 내셔널공항에 내릴 수 있어 더욱 좋다. 전철 이용이 가능한 공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슨 심술인가. 그 내셔널 공항의 이름이 로널드 레이건 공항으로 바뀌어 있잖은가. 이 마저 워싱턴의 뒤틀린 심기로 느껴진다. 도시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다. 정작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 사실에 둔감하고 오히려 외지인들이 민감하다. 도시를 알기 위해서는 얼마간 그 도시를 떠나 볼 필요가 있다. 내 눈에 비친 지금의 워싱턴 DC는 일그러진 얼굴의 도시다. 정가쪽으로 돌리면 더 그렇다.
워싱턴에 온지 사흘이 지나도록 클린턴 대통령의 얼굴은 신문이나 TV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다. 지금 상원에서 자신을 옥죄는 탄핵위협에 말려 복지부동의 자세를 보이고있기 때문인듯 하다. 일설에는 19일 밤 전국에 생방송되는 새해 연두교서를 준비하느라, 또 그 교서를 통해 경천동지의 혜택을 시민들에게 안겨 탄핵의 예봉을 꺾거나 아니면 둔화시키는 방안을 짜내는 중이라고 한다. 최악의 경우 탄핵재판 계류중인 피의자 신분에서 무슨 얼어죽을 연두교서냐고 의회가 험악한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 그럴 경우 클린턴은 미 역사상 연두교서를 거르는 최초의 대통령이 된다.
워싱턴 도착 하루 전 신문을 보니 클린턴은 민주당 당직자들과 함께 시내 코코란 미술관에서 열린 아내 힐러리를 위한 위로만찬에 참석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탄핵의 위협에 몰려있는 남편을 도와 지난 번 중간 선거를 승리로 이끈 아내의 노고를 위한 만찬이다. 그 자리에서 행한 클린턴의 연설이 좀 간지럽다. 『그 역경중에서도 아내는 드디어 해냈다. 그 아내를 사랑한다. 나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점에서 아내를 사랑해야 될 것이다』 그 연설에 힐러리가 눈물을 닦은 것으로 워싱턴 포스트는 보도하고 있다.
그 신문은 그러나 바로 그 지면에 「만 1년전(ONE YEAR AGO)...」이라는 특별란을 만들어 『르윈스키양과는 어느 형태 어떤 종류의 성행위도 갖지 않았다』는 클린턴 자신의 법정증언을 의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기사에는 또 눈이 풀린체 변명에 열중하는 대통령의 인물사진까지 곁들여져 이번 탄핵에 관한한 미국 언론 역시 속이 뒤틀려 있음을 반증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것은 이번 탄핵의 검사(MANAGERS)격인 13명의 하원의원중 헨리 하이드 법사위원장(공. 일리노이주)등 공화당 중진의원들이 토해내는 준엄한 논고이다.
『클린턴의 이번 범죄는 그가 미 연방정부의 판사와 검사, 대법원 판사, 법무장관의 임명권자라는 점에서 심각한 것이다. 미국 법체계가 흔들리고 있다. 그는 취임후 여려차례 다짐한 미국과의 약속을 깼다. 대통령직에서 쫓아내야 한다』(하이드 위원장)
『말단 공무원도 자기 주 지사를 고소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그 지사가 나중에 대통령이 돼도 마찬가지다. 거짓말하는 대통령을 묵인하면 다음 대통령에게 부담을 준다. 다가오는 한세기를 거짓말쟁이의 나라로 바꿔 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린지 그레엄 의원. 사우스 캐롤라이나)
『남의 부인과 혼외정사를 갖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늘어 놓을 수 있다. 하등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 개인의 사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거짓말을 판사들이 지켜보는 증언대에서 선서후 했을 경우엔 범죄다. 클린턴은 대통령 자리를 물려나야 한다』(스티브 버이어 의원. 인디애나주)
워싱턴은 다른 도시와 달리 표정을 지닌 도시다. 이 표정은 또 현지인 보다 외지인에게 더 잘 읽힌다는 점도 다른 것중의 하나다.<워싱턴에서>【언론인·우석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