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순이’, 공장의 ‘공’자에 여성성을 상징하는 ‘순이’를 갖다 붙인 말이다. 1970년대 공장에서 일하던 우리 누이들은 공순이라고 불렸다.
박봉에 열악한 작업환경에서도 고향의 남동생과 오빠의 학비를 벌기 위해, 부모님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각성제까지 복용해가며 밤새워 일했던 우리 누이들.
청춘을 기꺼이 희생한 그들 보기가 부끄러워 가슴 아픔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불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누이들은 언제나 강했다.
박정희 정권 말기 최대 노조탄압사건으로 기록되는 YH무역 노조사건이 1979년 8월9일 신민당 당사에서 터졌다. YH무역의 일방적인 폐업공고에 맞서 YH무역 여성 노조원 187명이 이날 신민당사에 진입, 폐업반대 농성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있던 YH무역은 재미동포 장용호가 1966년 자본금 100만원, 종업원 10명으로 출발한 중소 가발 제조회사. 가발경기 호황과 정부의 수출지원책에 힘입어 1970년대 초에는 종업원이 최대 4,000명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가발제조업체로 성장했다. 이후 장용호는 무리한 사업확장과 석유파동으로 인한 경기후퇴, 수출감소 등으로 어려움을 겪자 1979년 8월6일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했다.
이에 노조원은 관계기관에 정상화를 호소했으나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결국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8월11일 새벽 투입된 경찰의 무차별 폭력으로 강제 해산됐다. 이 과정에서 노조원 김경숙씨가 사망하는 비극까지 발생했다. 1970년대 한국노동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는 이 사건은 이후 잇따른 시위와 신민당 총재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 10월 부마항쟁으로 이어져 박정희 유신체제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