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이 10조원을 넘어서고 있지만 절대규모면에서는 여전히 해외 과학강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주요 선진국과 전면 경쟁을 해야 하는 한국의 산업구조상 R&D 투자는 더욱 확대돼야 합니다.” 국내 기초ㆍ응용과학 R&D 투자의 젖줄인 한국과학재단의 최석식 이사장은 과학 분야에서도 우리나라가 최근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중국과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일본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가 될 수 있다며 이러한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질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주력분야를 찾아 적극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의 연구 경쟁력에 대해 그는 “억대 연봉자들이 매년 증가하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는 우수한 인력들이 특별히 늘어서라고 보기는 어렵다”며 “훌륭한 성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보상을 해 하향 평준화되는 연구소 문화를 바꿀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 이사장의 이 같은 언급은 정부 예산이 투입된 연구성과에 대한 보다 엄밀한 검증과 평가를 예고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최 이사장은 또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해 “우리나라 전체 노동력 가운데 과학기술 인력의 비중은 선진국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친다”며 “정부는 기술인력 고용 사업장에 인건비 보조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기업은 고급인력을 활용한 새로운 경영전략을 창출해 과학기술 분야에서 양질의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취임 후 100일이 지났다. 그동안 역점을 두고 추진했던 분야는. ▦과학재단은 정부와 연구소ㆍ대학을 매개하는 기관이다. 양쪽을 행복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조직체계를 바꿨다. 기존 학문 분야별 편제에서 정부와 같은 프로그램별 편제로 변화를 줬다. 프로그램별로 바뀌어야 지원 대상과 책임ㆍ권리관계가 명확해진다. 프로그램별 조직형태인 과기부와의 연계도 분명해졌다. 최근 중점을 두고 있는 분야는 직원 복지와 일 잘하는 사람이 우대되는 조건을 갖추는 것이다. 특히 하향평등을 지향하는 출연연구소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정부 R&D 예산이 매년 급증해 세계 10위권에 이르렀다. ▦순위와 달리 규모로 보면 얼마 안 된다. 과학기술은 규모의 경쟁이다. 한해 R&D 예산이 10조원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경쟁상대인 미국과 일본에 비하면 각각 15분의1, 6분의1에 불과하다. 특히 우리 산업구조는 아직 어느 한 분야에 특화된 게 아닌 전면전 양상에 가깝다. 모든 분야에서 투자 수요가 많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미국 등 선진국에는 기술과 장비 누적효과가 있지만 R&D 역사가 짧은 우리는 대부분 새로 시작해야 하는 불리함을 안고 있다. 단기간에 성과를 이루려면 앞으로도 양적 투자가 더 늘어야 한다. -정부 R&D 예산이 과연 현장에서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에 대한 의구심도 크다. 일각에서는 총체적 감사가 필요하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과거에 교수가 학생들의 인건비 명목으로 예산을 전횡하는 사례가 있었는데 이는 결국 경비지원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기부 재직 시절 ‘선량한 과학자를 범죄자로 만들면 안 된다’는 생각에 관련 제도를 많이 바꾸었다. 대학원생들이 생활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해줬다. 하지만 교수 스스로의 합리적인 노력도 병행돼야 한다. 다만 감사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다. 현장 과학자들을 크게 위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문화적 수준을 높이는 방향으로 의식의 선진화를 이루는 접근법이 필요하다. -재단의 총예산이 1조원을 훌쩍 넘어섰다. ▦올해 예산이 총 1조 4,700억원 규모로 커졌다. 예산의 효율적 집행과 관리를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지난 30년 동안 축적해온 연구과제 지원 시스템을 ‘연구마루’라는 체제로 체계화했다. 이 시스템은 국내 기관뿐 아니라 태국 등 해외에서도 널리 벤치마킹될 만큼 우수성을 인정 받고 있다. 이와 함께 연구성과에 대한 엄정한 평가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목표와 결과를 직접 대조하는 방식의 성과 평가에 중점을 두고 있다. -국가 R&D 예산 증가로 이를 관리하는 정부 각 부처 기구가 비대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정부의 연구관리 전문기관을 부처별로 설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R&D 사업의 관리는 일반적인 관리업무와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인을 만족시킬 수 없고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기도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부처별 관리조직 신설을 막을 수 없다면 이들의 전문성을 키우는 노력이 적극 전개돼야 한다. 과학재단의 축적된 노하우가 적극 활용돼야 하는 부분이다. -해외에서 활동 중인 우수 과학두뇌들이 귀국을 꺼리고 있다. 과거처럼 애국심에만 호소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기본적으로는 교육과 대우의 문제다. 욕심 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제공해야 한다. 예컨대 미국에서 활동하는 과학자를 데려오려면 현지에서 근무할 때 얻는 세제혜택만큼은 보전해줘야 한다. 고국을 찾아 돌아오는 해외 한인 인재들에게 이 정도의 위험부담은 상쇄해줘야 하지 않나. 한국 경제는 이제 그만한 지불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공계 기피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예전부터 나오고 있는데 뚜렷한 해결책이 없는 것 같다. ▦정부나 산업계에서 역발상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주면 좋겠다. 즉 모든 산업 분야에서 기술인력들을 더 많이 고용하고 이용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노동력 대비 과학기술 종사자 비중은 2004년 기준 18.2%다. 스웨덴(38.6%), 독일(35.5%), 핀란드(33.5%), 미국(32.7%), 프랑스(30.5%)에 비해 매우 낮은 수준이다. 이는 산업체 수요가 앞으로 더 늘어나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우수한 인력을 가지고 새롭게 전략을 펼 수 있도록 산업계의 인력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취직만 잘되면 우수한 인재가 많이 몰릴 수밖에 없지 않겠나. 정부도 기업들이 이공계 인력을 많이 흡수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인센티브를 줘야 한다. 예컨대 독일은 기술인력 1인당 일정 금액의 보조금을 지원한다. 과학기술정책이 실업대책과 맞물려 가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수요와 공급의 미스매치(불균형)가 있지만 우리도 이 같은 양면전략을 써야 한다. 이공계 인력의 과다배출이나 질적 저하를 걱정하지 말고 취업을 더 늘려야 한다. -민간기업에서도 이공계 인력이 느끼는 회의감은 여전한 것 같다. ▦기업의 생존과 성장에 관련된 문제다. 아무래도 돈을 잘 빌려야 하니 재무통이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래도 삼성전자의 경우 많이 달라졌다. 임원의 절대규모는 이공계 계통이 더 많을 것이다. 세계 정상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기술인력이 핵심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는 기업문화가 정착돼야 한다. 기업은 환경적응 산업이다. 변화하는 기술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한국의 과학기술이 위협 받는다는 ‘샌드위치’ 위기론이 대두되고 있다. ▦중국의 R&D 투자규모가 엄청나게 늘고 있다. 또 중국이 무서운 점은 자원 이동을 국가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략적 선택과 집중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우리의 과제는 전면적인 중국의 양적 공세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부분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이 단기간에 도달할 수 없는 질적 분야에 치중해야 한다. 산업 분야별로 질적인 승부를 걸어야 한다. -북한과의 과학기술 협력은 어떤 상황인가. ▦국가 간 협력 협정의 첫 단추가 바로 과학기술 교류다. 과학기술은 이해관계가 갈리지 않는 공통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소프트하게 접근할 수 있다. 북한과도 과학기술 협력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다만 북한은 발등의 불인 먹을거리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만큼 전문인력 교류에 대한 관심이 덜했다. 좋은 작물을 키우는 기술을 습득하기보다는 곡식을 달라고 하는 양상이다. 길게 보면 우리의 과학기술을 많이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내년 남북 학생과 교수가 함께 가르치고 배우는 최초의 남북 합작대학인 ‘평양과학기술대학’이 개교하면 협력수준이 한층 개선될 것이다. 약력 ▦1954년 전북 부안 ▦전주 해성고 ▦전북대 법학과,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고시 19회 ▦맨체스터대 과학기술정책 석사 ▦과학기술부 과학기술정책국장ㆍ연구개발국장 ▦대통령비서실 과학기술비서관 ▦과기부 기획관리실장 ▦과기부 차관 ▦건국대 대외협력부총장 ▦현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과기 해외교류 보폭 넓힌다
과학재단 美·유럽등과 공동 심포등 38개국 59개 기관과 협력사업 추진 지난 8월9일 미국 워싱턴 인근 하이야트리젠시호텔. 김우식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 서남표 KAIST 총장, 최석식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등 국내 주요 과학기술 인사들이 참가한 가운데 재미 한인 과학자들 사이에서 최고의 축제로 불리는 '2007년도 한미 학술대회(US-Korea Conference on Science, Technology & Entrepreneurship)'가 성황리에 개최됐다. 이날 행사에서는 특히 미국의 과학계 고위인사가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아덴 베멘트 미 국립과학재단(NSF) 총재가 바로 주인공. NSF는 미국 내 주요 기초과학 분야 연구개발(R&D) 투자를 전담하는 정부기관으로 올해 예산만도 5조9,000억원을 확보했다. 세계에서 독보적인 과학기술 강국이라는 자존심으로 그동안 한미 학술대회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NSF의 태도가 바뀐 결정적 계기는 한국과학재단을 통해 마련됐다. 6월 한국과학재단 창립 30주년 행사 때 그의 방한이 어렵게 성사되면서 한국을 방문한 베멘트 총재가 급성장하는 국내 과학기술 역량을 목격하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게 재단 측의 설명이다. 덕분에 NSF로부터 각종 R&D 예산을 받아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 재미 한인 과학자들은 8월 학술대회에서 베멘트 총재와 다양한 정보를 교환하며 친목을 쌓을 수 있었다. 베멘트 총재의 예처럼 최근 한국과학재단이 적극적인 해외 과학기술 교류활동으로 주목 받고 있다. 재단의 해외접촉 전략은 국가ㆍ분야별 비교우위를 따져 철저히 실리 위주의 협력체계를 구축한다는 것. 국내 R&D 투자 위주의 기능에만 국한된 것 아니냐는 일반적 인식과 달리 현재 전세계 38개 국 59개 협력기관과 전략적 협력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권역별 과학기술 국제협력 강화를 위해 미국ㆍ스웨덴ㆍ중국ㆍ일본 등 네 곳에 별도의 주재 사무소를 설치, 운영 중이다. 이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끄는 나라는 미국. 재단은 미 버지니아주에서 '한미 과학협력센터(KUSCO)'를 운영하고 있다. KUSCO의 설립 일화가 흥미롭다. 1995년 미국을 방문한 김영삼 대통령이 재미 한인 과학기술자들에게 "고국이 지원할 수 있는 게 뭐가 있냐"고 묻자 현지 과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한인 과학자들이 한데 모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설립된 KUSCO 건물에는 현재 재미 한인과학기술자협회 등 한인 관련 단체 사무실이 대거 입주해 있다. 뿐만 아니라 2000년 이후 국내 기업의 본격적인 해외인재 유치활동이 시작되면서 KUSCO는 미국에서 활동 중인 유수의 한인 과학기술 인력이 채용되는 창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올해의 경우 유럽을 중심으로 그 어느 해보다 재단의 해외협력 활동이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다. 최 이사장은 8월 서울에서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와 공동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당시 심포지엄의 가장 큰 목적은 국제 학술네트워크인 IIASA에 한국이 적극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 IIASA의 세계적 학술 네트워크를 활용할 경우 국내 과학계에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를 위해 두 달 전인 6월부터 오스트리아ㆍ슬로바키아ㆍ스웨덴 등 유럽 국가들을 방문, 슬로바키아과학원(SAS)과 과학기술 협력각서를 체결하는 등 과학기술 강소국이 포진한 유럽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최 이사장은 "이들 국가와 접촉해보면 한국의 과학기술뿐 아니라 '과학기술혁신본부'와 같은 독특한 정부조직도 큰 관심을 끌고 있다"며 "조직의 경직성을 극복하고 한국처럼 정부 R&D 예산의 부처 간 조정기능을 수행하는 별도의 조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그들 나라에서도 심심치 않게 나오는 상황"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