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세계 최대의 통신분야 전시회인`ITU 텔레콤 월드 2003`이 열리고 있었다. 행사장에서 관람객의 인기를 독차지한 곳은 마이크로소프트나 AT&T가 아니라 바로 국내 통신업체인 KTㆍKTF의 전시관이었다. 직원들은 전시회 내내 밀려드는 방문객을 상대하느라 피곤했지만 얼굴 가득 넘쳐나는 자부심을 감추지 못했다.
현지에서 관람객을 맞던 한 직원은 “외국에 나와 보면 국내 IT 산업의 위상이 얼마나 높아졌는지 새삼 실감하게 된다”고 활짝 웃었다.
텔레콤 월드ㆍ컴덱스 등 세계적인 IT전시회에서 KTㆍSK텔레콤ㆍ삼성전자 등 국내 주요 통신서비스ㆍ장비업계는 외신의 주목을 받는 핵심 기업들이다. 국내 참여업체와 최고경영자들은 전시회장은 물론이고 각종 컨퍼런스 등에서 `대접받는` 유명인사가 되고 있다.
이 같은 위상은 단순한 대접에 그치지 않고 있다. MSㆍ인텔ㆍHP 등 세계 최고의 IT기업들이 잇따라 적극적 전략적 제휴를 맺을 만큼 KTㆍSK텔레콤은 세계적인 통신사업자의 지위를 확보해 나가고 있는 것.
◇통신은 IT 수출 고공비행의 토대= 정보통신부에 따르면 올들어 지난 11월말까지 IT분야 수출액은 총 515억7,100만달러. 특히 지난 9월이후 3개월 연속 사상 최고치를 잇따라 경신하면서 50억달러 이상의 수출을 기록, 수출 전선의 1등 공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IT산업이 수출의 주력으로 급성장할 수 있었던 것에는 통신사업자들의 과감한 인프라 투자와 풍부한 가입자망이 기반으로 작용했다.
국산 휴대폰이 세계 최고의 품질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3,300만명에 이르는 이동전화 가입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탄탄한 내수기반과 고품질 서비스에 대한 욕구가 업체들로부터 좋은 제품을 만들 수 밖에 없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비대칭부호분할다중접속(ADSL)의 급속한 확산으로 가능했던 세계 1위의 초고속인터넷 보급률 역시 각종 통신장비업계의 해외진출을 이끈 견인차였다.
최근에는 단순 제품 수출을 넘어서 `기술` 자체의 해외 진출도 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세계 최고 수준의 ADSL 기술. 동남아 등지에서 자국의 전자정부 프로젝트 구축 과정에서 잇따라 KT 등 국내 기업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는 것.
SK텔레콤 역시 몽골ㆍ이스라엘ㆍ러시아ㆍ베트남 등 아시아 주요 지역에 자사의 무선인터넷 플랫폼을 수출하고 있다.
◇동북아 허브를 꿈꾼다=최근에는 한국을 동북아 IT허브로 육성하려는 움직임도 본격화하고 있다. 세계 IT산업의 전진기지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구상이다.
실제로 정보통신부는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인 인텔의 국내 연구개발(R&D)센터를 유치한데 이어 IBM의 유비쿼터스 컴퓨팅 연구소 유치에도 성공했다. 이밖에 SASㆍHPㆍ텍사스 인스트루먼트 등 유수의 글로벌 IT 기업들도 R&D센터 건립 의향을 보이고 있다.
범정부 차원에서 추진되고 있는 IT 신산업 육성전략은 향후 IT산업은 물론 국가 경제 전체를 책임질 핵심사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한국과 중국ㆍ일본 등 동북아 3국간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국제표준 주도 움직임도 미국ㆍ유럽 등 기존 IT 선진국들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이미 이동통신 시장에서 세계 최대의 가입자망을 확보하고 있는 동북아3국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도할 경우 세계 시장 석권도 가능하리란 야심에서다.
◇넘어야 할 산도 많다=통신기업과 정책당국의 야심이 실현되자면 아직 넘어야 할 과제도 만만치 않다.
세계 최대시장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중국은 한국 IT산업의 절실한 협력 파트너이자 가장 강력한 경쟁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실제로 중국은 범국가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한국을 맹추격하고 있다.
장비ㆍ시스템 제조업체인 화웨이는 대표적인 사례다. 다국적 장비업계 관계자가 “화웨이는 머지않아 글로벌 장비ㆍ시스템 업체들이 힘겹게 부딪쳐야 할 경쟁 상대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할 정도로 중국 IT업계의 약진은 눈부시다.
차세대 IT기술 표준문제도 걸림돌이다. 국산 무선인터넷 플랫폼 표준인 위피(WIPI)가 최근 퀄컴과 미국 정부로부터 시장 진입 장벽요인이 되고 있다며 거센 공격을 받고 있으며 휴대인터넷 역시 기술표준 문제를 놓고 통상마찰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다국적 기업들의 잇따라 국내 표준 문제를 통상 마찰로 비화시키고 있는 것은 국내 IT기술 발전에 대한 견제 심리가 바탕에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정체위기를 겪고있는 한국 IT산업이 진정한 글로벌 스탠더드로 도약하자면 이 같은 내ㆍ외부 도전을 얼마냐 슬기롭게 극복하느냐에 달려있다고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다.
(기고)양유석 중앙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정부 역할이 중요하다
통신사업자들은 과거 90년대 이후 경쟁 도입, 시장 개방, 미래를 내다보는 정책을 바탕으로 한국을 IT(정보기술)강국으로 일궈낸 주역이다. 통신사업자들이 IT분야의 선도적 역할을 맡아 국내 시장을 개척하고 새로운 서비스를 꾸준히 개발ㆍ보급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신시장은 점차 성숙기에 접어들고 있어 새로운 돌파구 마련이 과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는 컨버전스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사업영역과 서비스를 활성화시켜 수익기반을 창출하고 해외시장 진출을 통해 고객기반을 확대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통신사업자의 해외 진출은 인수합병이나 지분참여 등을 통한 현지 통신네트워크의 확보가 필수조건이다. 글로벌 통신사업자로 도약하자면 정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정부는 직접 시장에 개입하기보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기업이 탄생할 수 있는 토양 마련에 머물러야 한다. 진출대상국에게 신뢰감을 주고 현지 파트너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글로벌 경쟁력을 보유한 통신사업자를 만들어 내는 일은 국내시장에서의 경쟁정책과 규제, 컨버전스 시대에 걸맞는 환경조성에서 출발한다.
세계적인 통신사업자를 키워내자면 글로벌 시각에서 통신서비스산업을 바라보는 정책과 규제가 필수적이다. 소모적인 경쟁이나 폐쇄적인 관점에서의 비대칭규제는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가 관리하는 적당한 경쟁에만 집착하다 보면 자칫 세계적 추세를 따라잡지 못해 통신산업의 경쟁력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이 같은 경쟁에만 몰두하고 있을 때 선진기업들은 인수합병과 전략적 제휴 등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높여 나가고 있다.
통신업계 글로벌 경쟁력의 핵심은 기술력, 마케팅력, 자금력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이 중 외국과 비교해 보면 국내업체의 기술이나 마케팅 경쟁력은 자금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다.
따라서 IT강국으로서 다양한 응용서비스, 정보통신을 전통적인 산업이나 분야에 접목시킨 전자정부를 비롯한 다양한 솔루션 분야에서 해외시장 기회를 모색하는 게 파급효과가 클 것이다. 이나마도 적절한 시점을 놓친다면 글로벌 경쟁력을 유지하거나 끌어올리지 못하게 된다.
국내 통신시장은 지금 IMF(국제통화기금)구조조정 이래 최대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IMT 2000서비스의 난항과 함께 초고속인터넷시장은 물론 이동전화시장 역시 성숙 단계에 진입해 구조조정이나 새로운 성장원을 찾기 위한 신규 서비스 및 사업 진출이 가속화할 전망이다.
이미 통신사업자들은 컨버전스시대에 맞추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나 신규사업을 빠르게 추진해 왔으나 정부정책의 더딘 결정이나 부처간 다툼으로 시장 형성이나 활성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모바일 뱅킹으로 대표되는 M-커머스, 무선 멀티미디어 인터넷, 방송과 통신의 대표적인 융합서비스의 하나인 위성DMB, 유무선 통신의 통합서비스, 휴대인터넷 서비스 등 세계 최초ㆍ최고 수준의 다양한 신규서비스는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따라서 정부는 시야를 넓혀 각 분야의 규제를 산업간 컨버전스 시대에 맞도록 대폭 개선해야 한다. 또 CDMA벨트나 동북아 IT허브국가 건설에 필요한 전략적인 거점지역에의 통신사업자 진출을 돕기 위해 좋은 여건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통신서비스를 기존 산업과 다른 특수한 성격을 가진 산업으로 단정하고 정책을 펼쳐왔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
통신서비스가 관련IT산업을 이끄는 선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장기적인 투자를 요구하는 전략적 거점국가 진출 과정에서 일본처럼 정보화촉진기금을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만하다.
정책당국이 일단 유리한 환경을 조성해주면 IT산업 해외진출의 길을 닦는 역할은 전적으로 통신사업자의 책임이다.
이를 위해 통신사업자들 역시 보다 철저한 글로벌 전략을 가지고 해외진출에 나서야 한다. 장기적인 투자전략과 중단기적인 사업성을 동시에 고려한 전략적 선택만이 성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이다.
<특별취재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