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 해양경영사연구] 발해-일본-당 무역연구

鈴木靖民(일본 국학원대학 교수)8~9세기경 현재의 중국 동부 북한 러시아 연해주에 있었던 발해 사람들의 생업은 수렵 어로위주였으며 목축업과 농업이 일부 행해졌다. 이와함께 섬유제품, 공예품, 광산품, 토기, 도자기도 만들었다. 이러한 다양한 생산물들은 발해내에서 소비·유통되는 한편 국가공납에 충당됐다. 또 일본이나 당나라 등과의 국제간 무역에 이용됐다. 발해는 727년에서 919년까지 빈번하게 일본으로의 사절을 파견했다. 사절파견은 신라에 대항하는 것 등의 외교목적을 내걸었지만 실상 무역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771년의 발해사는 17척이나 되는 대선단으로 구성돼 일본에 왔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는 상인도 다수 동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809~827년사이에만 발해사는 일본에 9차례나 들어왔다. 841년 사절단의 경우 105명 가운데 과반수가 수령이다. 이들 수령은 발해 각지나 여러 집단의 지배자를 가리킨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배지에서 획득한 모피 등 특산물을 무역품삼아 일본 각지에서 무역을 행했다. 발해와 당나라 간의 무역도 조공과 「책봉=회역」의 관계를 통하여 행해졌다. 조공품은 일본에 대한 물자 품목과 거의 같다. 발해는 당에 1년에 2~5회 걸쳐 견당사를 파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견당사에는 왕족, 관리 등과 함께 무역을 행하는 수령들이 있었다. 발해와 당과의 무역을 증명하는 것은 도자기다. 발해의 도자기가 당나라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오고 있지만 실물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반해 당의 도자기는 발해 유적 곳곳에서 발견된다. 상경 용천부 유적의 발굴 조사에서는 궁전이나 회랑 유적에서 현지에서 제작된 도자기와 함께 삼채 등 중국제 도자기도 다수 발견됐다. 연해주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발해 유적지인 우스리 하 동쪽의 마리야노프카토 성과 상경 용천부 또는 동경 용원부와 위치하고 8~9세기에 건설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그라스키노트 성에서는 중국 절강성 월주요의 자기편이 출토되고 있다. 이 유적지 일대는 발해의 대외무역창구로 상업 무역에 기반을 둔 국제색이 풍부한 항만 마을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고 상상된다. 청해진을 거점으로 장보고 세력을 주축으로한 신라인들이 당·일본과의 무역을 장악하고 있을 당시 북쪽에서는 당-발해-일본으로 이어지는 교역도 함께 이뤄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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