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방폐장 부지 선정에 부쳐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처분장(방폐장) 부지로 경주 봉길리 지역이 선정됐다. 지난 20여년 가까이 주민과 시민단체의 반대에 부딪혀 표류해오던 국책사업의 부지 선정이 주민투표를 통해 마무리된 것이다. 방폐장 부지 선정작업은 지난 86년 이래 안면도ㆍ굴업도ㆍ영광ㆍ울진ㆍ부안 등에서 모두 실패했다. 특히 부안에서 있었던 폭력사태의 심각성을 경험한 우리로서 경주의 부지 선정 성공은 그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 상당한 에너지원을 원자력발전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로서 방폐장 건설은 필수 국책사업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국민의 환경의식이 높아진 현 상황에서 님비 시설의 전형으로 인식되는 방폐장 건설을 기피하는 지역주민의 반대 투쟁은 어쩌면 당연한 자구책일 것이다. 이번 방폐장 부지 선정의 성공은 기피시설 설치에 대한 주민의 동의를 얻는 새로운 모델을 정립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는 것이다. 정부는 주민의 동의를 얻기 위해 여러 조건을 제시했다. 방폐장에서 처리되는 폐기물을 중저준위방사성폐기물(원전ㆍ병원 등에서 사용한 의복ㆍ장갑ㆍ의료기기 등)로 제한했다. 고준위방사성폐기물인 사용 후 핵 연료를 제외시켜 시설의 안전성을 높인 것이다. 그리고 3,000억원의 특별지원, 한국수력원자력 본사 이전, 양성자가속기사업 지원 등의 경제적 지원을 ‘당근’으로 내놓았다. 이것을 가지고 새로 제정된 ‘주민투표법’에 따라 주민투표를 실시해 주민의 동의를 얻어낸 것이다. 결국 경주 지역 주민은 방폐장 설치에 따르는 위험성의 회피보다 경제적 지원에 따른 발전을 선호한 것이다. 개발이냐, 환경이냐의 가치 논쟁에서 개발의 가치를 높게 산 것이라 볼 수 있다. 민주적 절차에 따른 주민의 결정은 방폐장 설치에 따른 지역의 갈등을 일시에 잠재웠다. 많은 국책사업이 환경 문제를 이유로 주민과 시민단체의 반대에 부딪혀 지연되거나 중단되는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경주 방폐장의 성공은 환경 거버넌스(governance)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시사점을 짚어보자. 첫째, 님비 현상이 있는 국책사업의 추진은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관료주도의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인 정책 결정은 더 이상 통할 수 없게 됐다. 주민의 동의와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려면 중앙정부ㆍ지방자치단체ㆍ기업ㆍ주민ㆍ환경단체 등 모든 이해 주체(stakeholder)가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시스템의 가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국책사업계획의 초기단계부터 환경성을 검토하지 않으면 안된다. 환경의 고려 없는 국책사업은 성공할 수 없다. 내년부터 도입 예정인 소위 ‘전략환경평가’제도를 잘 운영하면 이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부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정책을 결정하거나 정보의 왜곡은 종국에는 지역주민의 불신을 초래한다. 환경운동단체의 또 다른 정보 왜곡이나 투쟁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환경 관련 정보는 과학적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신뢰를 바탕으로 대화가 이뤄져야 주민 설득이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시설을 설치함에 있어 환경 피해의 최소화와 안전성의 확보를 확실히 보여주지 않으면 안된다. 그동안 님비 시설에 대한 주민의 결렬한 반대는 기존의 님비 시설로부터 발생하는 피해를 눈으로 보고 겪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설치하는 님비 시설에 대한 불신이 클 수밖에 없었다. 경주 방폐장이 안전하게 설치돼야 앞으로 고준위방사성폐기물처분장의 확보도 가능하다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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