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풍토 속에서 경제수장은 재벌들에는 여전히 무서운 존재다. 경제수장의 말 한마디에 내로라하는 재벌 총수들도 부들부들 떨었던 외환위기 직후에 비할 바 아니지만 그의 발언은 오너들의 의사 결정에 무거운 압박으로 다가간다.
지난 22일 정례 브리핑 자리에 선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그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 계열사의 등기이사 자리를 내놓은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기업인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문제”라고 참 단순하게 말했다. “대한민국은 참 자유로운 자본주의”라는 수사(修辭)까지 곁들이면서.
부총리의 발언이 너무나 편해 보인 탓이었을까. 아니면 재벌의 행위에 대한 주변의 인식이 관대해진 탓일까. 그의 발언에 무게감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취임 후 처음 꺼낸 경제수장의 재벌관(觀)은 별다른 감흥 없이 지나쳐갔다.
만 사흘이 지난 후 부총리의 발언을 촘촘히 되새김질해봤다. 그리고 환란 직후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며 만들었던 ‘재벌개혁 5+3원칙’을 오버랩시켜봤다. 제왕적 오너의 행태가 한국 경제의 몰락을 가져온 주범이라며 수술대 위에 올렸던 7년 전, 대통령까지 나서서 주창했던 것은 이른바 지배주주의 책임경영이었다.
물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시대가 변하면 원칙도 바뀔 수 있다. 기업의 기(氣)를 살려줘야 한다는 명분이 현시대의 대세로 자리할 만큼 재벌에 대한 우리의 시각도 변했다. 그럼에도 투명ㆍ책임경영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할 수 없는 명제이고 금기다.
부총리의 말대로라면 일부 오너들의 등기이사 사퇴에 대해 “참여정부의 재벌개혁정책에 대한 도전이자 투명ㆍ책임경영을 위한 사회적 합의를 파기하는 것으로 집단소송제를 피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시민단체들의 지적은 그저 ‘의미 없는 트집잡기’에 불과하다.
부총리는 지금이라도 재벌에 대한 인식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 ‘색깔 없는 부총리’가 재벌관에까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부총리의 재벌 인식은 ‘자유’를 뜻하는가, 아니면 ‘방임’을 의미하는가. 진정으로 오너의 경영 행위를 자유 선택 문제라고 생각한다면 출자총액제한제는 왜 그냥 두는가. 말과 정책 방향이 일치하는 경제수장의 모습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