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김희중 경제부장 jjkim@sed.co.kr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경제가 나아진다는 확신으로 함께 노력하면 경기회복을 훨씬 앞당길 수 있습니다”.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은 나라 살림의 여건이 어느 때보다 어렵지만 경제 심리의 흐름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재정조기 집행과 추경예산 편성, 경기 침체에 따른 세수 부족 우려로 예산편성 여건이 크게 악화되고 있어 나라살림하기가 여간 어려운게 아니라는 박 장관은 “여건이 힘들어졌지만 적자 국채를 발행하지 않고 재정건전기조를 이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박 장관은 200조원에 이를 정도로 방대해지고 있는 각종 기금을 일반회계와 특별회계에 합쳐 통합재정으로 관리해 방만한 운영을 차단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강조했다.
-경제가 쉽게 회복되지 않고 있습니다. 경기회복을 자신하는 정부의 목소리도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어려운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오르막길에서 힘들다고만 생각하는 마라톤 선수와 이겨낼 수 있다고 다짐하는 선수의 차이는 분명 다릅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긍정적인 면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올해는 해마다 바닥을 드러내던 저수지에 물이 가득 차 있고 큰 산불도 없었습니다. 경기 침체와 노사분규도 실제보다 부풀려져 알려지는 측면도 있습니다. 밝게 보고 자신감을 가지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부 부처들이 내년 예산요구액을 제출하는 `예산시즌`입니다. 경제가 어렵다보니 나라살림짜기도 어렵지 않을 것으로 보이는데요.
▲내년도 예산편성은 어느 때 보다도 힘들 것 같습니다. 최근 몇 년과 달리 한국은행 잉여금도 기대할 수 없고 공기업 민영화를 통한 세외수입은 거의 전무합니다. 국채 발행도 건전재정을 깨드릴 수 있기 때문에 생각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세외수입에서만 5조원이 실질적으로 줄어들 전망입니다. 더욱이 내년으로 넘어갈 세계잉여금도 올해 추경예산편성에 반영된 상태입니다. 내년에 실제로 늘어나는 가용자원도 4~5조원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쓸 곳은 많지 않습니까. 당장 국방비를 국민총생산 대비 3.2%수준으로 올린다는 대통령의 약속이 여러 차례 확인되고 있는데요.
▲국방예산을 늘려야 한다는 당위성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전체 예산 순증규모가 5조원 남짓한 터에 국방비를 3.2%수준까지 늘리려면 4조9,000억원이 더 들어갑니다. 순증전액을 투입하기는 어려워 3% 수준을 넘기가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연차적으로 국방비 증액을 추진해 나갈 계획입니다. 다른 부처의 사업도 효율적으로 조정하겠습니다.
-여러 여건을 감안할 때 적자재정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는 것 같은데요. 특히 2~3년 단위의 중기재정을 추진하는 마당이라면 한해 정도의 적자재정은 감수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습니다.
▲투자재원을 확보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제의 안전판인 재정건전기조를 바꾸기 보다는 세출전반에 걸친 구조조정과 각계 의견수렴과 조정을 통해 부족재원을 해소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세외수입이 줄었다고 국채발행으로 보충할 경우 매년 반복적으로 적자 국채를 발행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특히 국제사회에서 국채발행을 전전재정기조의 후퇴로 인식할 때 국가신인도 하락의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논의 자체에 신중함을 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선진국의 사례를 볼 때 중기적인 재정운영에서도 적자가 늘어나면 줄이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참여정부가 짜는 첫번째 예산에서 적자국채를 발행할 경우 임기내 균형재정으로 다시 돌아가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여유가 없어진 재정을 감안할 때 정부의 경기대응능력이 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우려됩니다. 또 추경까지 편성됐는데도 경기는 영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는데요.
▲한쪽만 보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재정건전성이 상대적으로 뛰어나다는 점을 간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미국, 일본과 비교할 때는 물론이고 비슷한 규모의 경제를 가진 어느 국가와 견주어도 우리의 재정건전성이 훨씬 나은 편입니다. 지금까지와 비교해서 어려워졌다는 것이지 상황이 비관적은 아닙니다.
추경예산 편성도 시기를 잘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생산과 투자, 소비가 어려운 가운데 유독 건설투자만이 크게 늘고 있는 것은 정부의 재정 조기집행에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봅니다. 올들어 5월까지만 예산과 기금이 전년보다 10조원 넘게 풀리면서 건설경기를 뒷받침했습니다. 국회에 머물고 있는 추경예산안이 확정돼 실제 방출되면 경기회복을 선도하는 기능을 할 것으로 기대합니다.
-과연 언제쯤이나 우리 경제가 회복될 수 있을 지가 궁금합니다.
▲몇 가지 긍정적인 변수가 있습니다. 각종 지표를 보면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지만 금리인하와 추경예산 집행, SK글로벌 사태, 카드채 위기의 진전과 조흥은행 매각이 성사됐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사스(SARSㆍ급성중증호흡기증후근)가 진정되고 미국과 유럽의 주가가 오르고 경기가 살아나는 조짐입니다. 이를 감안하면 하반기부터는 우리 경제도 점차 나아지리라 봅니다. 외국계 연구기관들은 경기순환상 내년부터는 한국경제가 본격적인 회복국면에 진입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부예산 못지않게 기금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효율적인 기금운용과 민영화 방안이 궁금합니다.
▲기금은 운용규모가 191조원, 사업비 규모가 58조원에 이르는 등 규모와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습니다. 기금을 일반회계와 특별회계에 합쳐 통합재정으로 관리해 방만한 운영을 차단할 생각입니다. 현 단계에서 민영화를 검토할만한 대상은 없다고 판단되지만 폐지 또는 통폐합은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계획입니다.
-특히 국민연금은 100조원을 넘어선 적립금 규모만으로도 국민경제의 주요 변수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장래에 연금이 고갈될 것을 걱정하는 국민도 적지 않습니다.
▲국민연금은 매월 1조5,000억원씩 적립금이 늘어나 2030년에는 644조원에 이르게 됩니다. 거시경제안정과 국민경제 발전의 주요 변수가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식입니다. 국민연금이 이미 복지의 문제를 넘어 금융시장과 경제전체의 문제로 대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정부는 우선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추기 위해 자산운용체계를 개편하는 방안을 마련중입니다. 또 연금 고갈 위험성에 미리 대처하기 위해 소득대체율(평균소득 대비 연금급여)을 낮추고 보험료를 올리는 방안도 구체적인 의견접근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철도노조 파업 후유증으로 나라가 어수선합니다. 정부의 입장이 변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더 꼬였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철도를 민영화한다는 정부의 구조개혁원칙이 바뀐 적은 없습니다. 먼저 구조개혁한다는 원칙에 합의한 상태입니다. 공무원 신분이 변하는 노조의 입장에 일부 수긍이 가지만 무리한 요구는 재원마련차원에서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철도청 직원들이 주장하는대로 신분이 바뀌어도 공무원연금 수령자격유지는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국민연금으로의 전환 등 대안을 마련중입니다.
-참여정부들어 각종 위원회와 태스크포스팀이 의욕적으로 발족됐지만 제대로 기능하지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지적도 있습니다. 정책결정의 효율성이 떨어질 우려도 크지 않습니까. 옛 경제기획원과 같은 규모는 아니라도 경제정책의 컨트롤 타워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요.
▲일부 정책혼선으로 비춰진 사례도 있지만 정부의 정책과정이 과거와 달리 활발한 토론과 이해관계인의 의견수렴을 통해 이뤄지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일 뿐입니다. 사회적 합의를 통한 예측가능한 정책운용이 자리잡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과거 사회적 약자였던 계층이 이제는 대등한 위치에서 정책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은 중장기적으로 혼돈과 갈등의 소지가 그만큼 줄어드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경제 정책은 경제부총리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습니다.
■ 발자취
우리나라에서 박봉흠 장관만이 갖고 있는 유일한 기록이 하나 있다. 예산처의 전신인 옛 경제기획원까지 포함해 예산처 42년 역사동안 현직 차관에서 장관으로 바로 승진한 기록이다. 국내최고의 재정통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얘기다.
박 장관이 지나온 길을 보면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경우가 없다는 점이다. 인상도 꼿꼿하기 그지 없다. 죽마고우인 이문열씨는 “봉흠이는 공부도 잘 했지만 언제나 성실하고 사리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말한다. 여기에는 평생 교직에 몸 담았던 부친이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교감으로 봉직하던 박 장관의 부친은 아들의 비범한 재능을 살리기 위해 평교사로의 강등을 감수하했다고 한다. 우수학교가 많은 부산에서 박 장관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기대대로 박 장관은 전형적인 `모범생`의 길을 걷는다. 부산중과 경남고를 거쳐 서울상대를 졸업한 박 장관은 73년 행정고시(13회)에 합격, 공직에 발을 들인 후 물가와 재정ㆍ예산정책을 주로 맡았다. 박 장관의 치밀한 업무스타일이 빛을 발한 것은 외환위기직후. 누란의 위기에서 5년만에 건전재정을 회복하는 중심에 그가 있었다. 차관보급인 정부중앙부처 1급중에서도 요직으로 손꼽히는 예산실장을 두 해나 역임하면서 건전재정의 기틀을 닦았다. 예산실장에서 차관으로, 차관에서 장관으로 오른 것도 이 같은 실력(?) 때문이다.
언제나 일에 쌓여 지낸 박 장관이지만 새 정부 들어서는 더욱 바쁘다. 모든 부처의 대통령 업무보고에 배석하고 주요 회의에는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는 것이다. 예산처의 위상도 알게 모르게 높아지고 있다.
빈틈이 없어 보이는 외모와 달리 사람사귀기를 좋아하고 술을 즐긴다. 운동과 거의 담쌓고 지낸다는 점도 특이하다. 하지만 요즘에는 약간 바뀌었다. 무엇 때문에 힘들여 땀흘리며 산을 오르냐고 반문하던 그는 최근에는 뒷동산에 오르며 사색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애쓴다. 박 장관에게는 남이 갖고 있지 못한 생활의 활력소, 힘의 원천이 하나 있다. 40줄에 얻은 늦둥이 외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바로 그 것이다.
▲48년 경남 밀양 출생
▲경남고ㆍ서울대 상대ㆍ미 듀크대 경제대학원 졸업
▲73년 행정고시(13회) 합격
▲91년 경제기획원 물가총괄과장
▲96년 재정경제원 경제개발예산심의관
▲98년 예산청 예산총괄국장
▲99년 국회 예산결산특위 수석전문위원
▲00년 기획예산처 예산실장
▲02년 기획예산처 차관
▲03년 기획예산처 장관
■ 내가 본 박봉흠 장관 - 이상용 한국은행 감사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은 내게 놀라움을 안겨 주는 사람이다. 행정고시 동기로 만나 경제기획원, 재정경제원 등에 같이 근무하면서 친구사이로 지낸 박 장관에게서 세번의 감명을 받은 것 같다. 31년전인 73년 행시에 합격해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이 아직도 새롭다. 그처럼 이지적인 동시에 유순하기 그지 없는 사람도 드물다.
두번째 놀랐던 것은 인사에서였다. 옛 경제기획원 시절 요직중의 요직인 예산총괄과장으로 내정돼 있었지만 동기에게 두말도 없이 양보했던 일화는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 세번째는 외환위기후 나라살림을 튼튼히 하는데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는 점이다. 위기 당시 `재정의 제 역할 수행론`과 `5년내 균형재정 필수론`을 절묘하게 엮어 위기탈출을 위한 재정의 역할을 다하면서도 균형재정을 달성해냈다. 실무국장과 예산실장인 그의 공헌이 매우 컸음은 두말나위 할 것이 없다.
박 장관은 한 마디로 `유능한 관료의 표상`이다. 그리고 철학이 있는 사람이다. 옛 경기획원 시절부터 박 장관이 소신처럼 되풀이하던 `예산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정책의 숫자적 표현`이라는 지론이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 하다. 정부 부처에서 올라오는 예산요구액을 삭감해야 하기에 때론 악역을 맡아야 하는 예산업무에 대한 이해와 사랑, 자부심을 이런 언어로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은 그가 철학을 지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박 장관은 겸손한 사람이다. 언론에서 `대통령이 평가하는 유능한 관료 두사람 가운데 하나`고 `부처 업무보고 때마다 항시 배석하는 장관`이라면 내심 우쭐거릴 법도 한데 그런 게 전혀 없다. 될 수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는 장점을 그는 갖고 있다.
친구로서 나는 즐겁다. 박 장관의 면모와 진가를 다시금 확인할 때마다 마음이 좋아진다. 그가 아직도 날 더 놀라게 해줄 일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유능하고 양보할 줄 알며 겸손한 인성을 갖추기는 힘든 일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있다. 바로 박봉흠 장관이다.
<정리=권홍우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