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파산·빈부격차 확대등 신용사회 문제점 파헤져■ 신용카드 제국
로버트 매닝 지음/참솔 발행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최근 한 카드회사의 광고카피가 화제다. 이 광고는 (여행을)떠나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자극한다. "떠나고 싶다. 그런데 돈은? 걱정 없다. 카드 한 장이면 된다. 열심히 일했든 아니든 상관 없다.
떠나라. 신용사회에 무슨 걱정." 이런 식이다. 신용카드의 위력을 여실히 과시하는 광고이다.
그렇다. 지금은 신용사회이다. 우리나라 신용카드 발행규모는 이미 1억장을 넘어섰다.
경제활동인구 대비 1인당 4.3매 꼴이다. 현금을 가지고 다닐 필요가 없음은 물론, 언제든 자신의 경제능력을 넘어선 소비가 가능하다.
카드산업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사실이 공공연히 확인되면서 재벌기업들이 앞다퉈 이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럼에도 2000년 한 해 카드업계는 전년대비 700%의 이익 증가율을 누렸다. 정부도 앞장서 카드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신용카드는 금융혁명의 총아인가, 경제 주체들을 파산의 길로 몰아가는 악마의 화신인가. 미국의 경제사회학자 로버트 매닝의 '신용카드 제국'은 카드로 인해 무너지고 있는 개인의 삶에서부터 사회 불평등 구조의 심화에 이르기까지 신용카드 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갖가지 적신호들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분석틀은 미국이다.
매닝은 1980년대 초 미국사회의 경제적 불평등 규조의 변화와 실질임금의 감소가 중산층과 노동자에게 미친 영향을 연구하면서 신용카드의 문제점을 접하게 되면서 신용카드의 구조적 문제점에 대한 연구에 15년을 쏟았다.
그 결과물이 '신용카드 제국'. 이 책은 학계에서 신용카드 제국이 만들어낸 사회ㆍ경제적 문제와 파장을 분석한 최초의 책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책은 우선 현대인이 어떻게 신용카드에 중독되었는가를 설명한다. 1980년대 레이건 이후, 미국정부는 노동시장 유연화와 국제경쟁력을 이유로 반노동자적인 정책을 강했했다.
이로써 실업률을 급격히 치솟았고, 실질소득의 감소와 저축률의 하락이 뒤따랐다.
신용카드회사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구조조정과 경기침체로 내몰린 노동자들은 물론, 경제능력이 없는 대학생과 노인층, 저소득 빈민층과 파산한 개인에 이르기까지 카드회사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부담 없이 쓰기만 하세요"라는 카드회사들의 광고카피에 속아 이들 사회적 약자들은 헤어날 길 없는 '부채의 덫'에 걸려들었다.
마스터카드로 비자카드를 메우는 식의 생활, 미국인들은 이제 카드 없이는 단 한 달도 연명하기 어려운 카드 중독자가 돼 버렸다.
카드회사들의 공격적인 마케팅은 1980년대 제3세계 외채위기와 관련이 크다. 멕시코ㆍ아르헨티나 등에서 부동산 담보대출로 엄청난 손실을 입은 시티은행 등은 소매금융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현대인의 카드 중독은 이처럼 금융회사들의 탐욕스런 이익창출 욕구와 동전의 앞 뒷면을 이룬다.
이 책은 또한 카드 중독현상 외에 수많은 폐해들을 지적한다. 골드카드ㆍ플래티넘 카드 등의 신용등급은 '현대판 골품제'이며, 노인과 고아들을 후원한다는 명목으로 인간의 자선욕망을 부채질하는가 하면, 갖가지 포인트와 적립금을 내세워 근검절약 정신을 자극해 소비행위를 부추기기도 한다. 이 모든 부조리는 한 길로 모아진다. 바로 '빚의 수렁'이다.
저자는 미국에서 시작된 신용카드를 둘러싼 사회적 광란이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음을 주목하면서 "이미 영국ㆍ아일랜드ㆍ멕시코ㆍ아르헨티나ㆍ홍콩 등지에서도 '일단 쓰고 보자'는 식의 미국식 문화가 만연해 있다"고 개탄한다.
신용카드 제국은 선량한 시민을 사회적으로 조장된 소비의 덫에 몰아넣고, 그 결과를 전적으로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냉혹한 얼굴을 지니고 있다.
이제 세계 시민들은 차가운 제국에 저항하는 운동들을 벌이기 시작했다. 카드 사용 반대, 카드 수수료 인하 운동 등이 그것이다.
현 시대, 소비의 집단 광기를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저자는 소득과 소비의 균형을 중시하는 경제윤리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어디서나 통한다고 아무때나 신용카드를 내밀면 지옥 문이 열린다"고 엄중 경고한다.
그러나 "지나친 음주는 건강을 해친다"는 경고가 알코올 중독자에게 효과가 있을까. 신용카드 제국에 사는 소비자들을 '카드 중독'상태라고 진단한 당사자가 내린 처방이 너무 가볍게 비쳐진다.
문성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