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세상을 바꾼다. 지난 90년대 이후 컴퓨터, 그리고 최근 휴대전화가 한국 사회에 가져온 엄청난 충격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한편 지난해 이맘때 일어난 가짜 줄기세포 소동을 생각해보자. 수십조원을 벌어오리라던 기대가 산산이 깨졌고 구세주를 만난 줄 알았던 많은 장애자, 불치병 환자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리지 않았던가. 과학이 삐끗하면 온 나라를 만신창이로 만들 수도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게 됐다.
오용하면 환경재난등 악몽초래
과학은 두 날을 가진 칼에 비유된다. 그것은 유토피아를 가져올 수 있으나 악몽으로 바뀔 수도 있다. 20세기 중엽 나치ㆍ일본군의 인체 생체실험, 원자폭탄, 환경 재난을 겪으면서 서양에서는 과학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성찰이 싹텄다. 과학기술윤리가 문제되기에 이른 배경이다. 특히 생명공학이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자 이를 감시할 생명윤리에 대한 관심이 전세계에 퍼져갔다. 99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세계과학회의가 채택한 선언은 과학자들의 뼈아픈 자기비판이었다. 이제 과학자들은 과학연구의 자유보다 과학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게 됐고 과학윤리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10여년 전 파리에서 유네스코(UNESCO) 국제생명윤리위원회 모임에 옵서버로 갔을 때 과학자의 책임을 역설하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의 철학적인 연설을 감명 깊게 들은 일이 있다. 요즘에는 유네스코 세계과학기술윤리위원으로서 자주 윤리회의에 가는데 여러 나라 정치지도자들의 유달리 높은 관심에 놀라고는 한다. 방콕회의는 마하 짜끄리 시린톤 태국 공주가 좌장을 맡아 과기부 장관이 이끌었고 아시아 과기부 장관들의 공동선언을 채택했다. 베이징회의에서는 루용샹 과학원장(전인대 서열 10위)이 친히 쓴 기조연설을 했고 마닐라회의는 막사이사이 국회 과학기술위원장이 토론을 종합했다. 다음 주에 다카르에서 열리는 회의에는 세네갈의 대통령과 총리,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장관들이 참석해 과학기술윤리선언을 발표할 예정이다.
부다페스트회의의 후속사업으로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과학기술윤리’ ‘과학기술과 인권’을 펴냈다. 우리 정부도 윤리에 관심과 성의를 보였다. 과학기술부가 생명윤리자문위를 구성해 생명윤리법 입법을 서두른 것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정부가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에 의뢰해 ‘과학기술인 헌장’을 제정한 것도 그 연장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무렵 ‘황우석 광풍’이 불면서 상황은 역전됐다. “윤리가 과학의 발목을 잡는다”는 일부 과학자들의 터무니없는 주장이 언론에 먹혀들었던 것이다. 윤리를 경계하는 이상한 분위기를 언론이 부추겼고 정부가 이를 방치했다. 불행한 일이었다. 윤리가 과학을 반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생명윤리학자들은 생명공학연구의 절차상 문제점을 지적했을 뿐이다. 이 충고에 귀를 기울였다면 황 스캔들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황우석 사건이 일단락되면 윤리가 뜰 것이라는 성급한 예측도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예언은 맞지 않았다. 윤리에 대한 무관심은 좀처럼 고쳐질 기미가 없다. 연구 진실성에 대한 논의는 있었다. 연구윤리 확립은 물론 중요하다.
윤리강령 제정·전문가 육성을
하지만 더 시급한 것은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과학기술윤리의 근본 문제에 관한 활발한 연구와 토론을 고무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교육에 반영될 필요가 있다. 과학기술 진흥에 무관심한 나라는 없다. 다만 과학기술윤리에 대한 배려도 세계적인 추세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계과학기술윤리위(COMEST)는 환경윤리ㆍ외계윤리ㆍ나노윤리ㆍ윤리교육과 함께 과학윤리강령을 만드는 작업을 몇 해째 계속하고 있다. 정부는 이미 기술영향평가에 인문사회과학자들과 과학기술학(STS)자들의 비판적인 의견을 포함시키고 있다. 우리가 ‘과학기술인 헌장’을 확장해 ‘과학기술자 윤리강령’을 만들 수 있다면 앞서가는 나라가 될 것이다. 다른 나라들이 하듯이 한국이 코메스트회의를 유치해 윤리 붐을 한번 일으켰으면 좋겠다. 미국ㆍ일본처럼 과학기술윤리 전문가들을 사방에서 모셔가는 날이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