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재무장관회의와 통상장관회의를 앞둔 21일. 일본이 갑작스레 우리나라의 일본산 수산물 수입규제 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기 위한 사전절차(양자협의요청)에 돌입하자 통상 및 해양당국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초 일본이 WTO 제소의 타깃으로 이달 초 금수(禁輸) 조치를 강화한 대만을 겨냥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일본은 WTO 산하 위생검역협정 집행기관인 SPS위원회에 우리나라와 중국·대만의 수산물 금수 조치에 대해 지속해서 문제를 제기해왔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 개 국가가 일본산 식품에 대한 수입규제가 가장 강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10년 8만1,087톤이었던 일본산 수산물 수입 규모는 2014년 기준 2만6,657톤으로 4분의1 토막이 났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기점으로 수입량이 급감한 것이다.
통상당국 안팎에서는 일본의 돌출 행동에 다른 속셈이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일본이 우리나라가 가입을 저울질하고 있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에서 협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먼저 칼을 빼 든 것이라는 해석이다. 23일 도쿄 한일 재무장관회의와 필리핀 한일 통상장관회의를 앞두고 의표를 찌르는 것도 이 같은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사실 중국과 대만의 수입장벽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높아 일본의 타킷이 된 배경조차 석연치 않다. 우리나라는 후쿠시마 주변 8개 현의 수산물에 한해서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그 이외 지역은 세슘이 검출될 경우에만 일본 정부가 발행한 검사증명서를 내도록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중국은 후쿠시마 주변 10개 현에서 생산되는 모든 식품 및 사료 수입을 금지하고 있다. 그 이외의 지역에서 생산되는 채소·우유·과일·수산물 등도 일본 정부가 발행한 방사성물질 검사 증명서와 원산지 증명서를 함께 요구한다. 대만은 당초 후쿠시마 주변 5개 현에서 생산된 모든 식품(주류 제외)에 대해 수입을 금지하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전수조사만 했다. 하지만 올 초 원산지가 허위 기재된 일본산 식품이 발견되면서 5월 들어 원산지 및 방사성 검사 증명서를 의무화하는 등 수입제한 조치를 대폭 강화했다. 일본당국은 당장 "WTO에 제소하겠다"고 펄쩍 뛰었다.
하지만 화살은 엉뚱하게도 우리나라를 향했다. 이에 대해 정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통상장관회의에서도 일본이 우리 측에 수산물 금수 조치를 풀라고 요구할 텐데 과학적 근거가 있으니 안 된다고 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앞으로 예정돼 있는 TPP나 한중일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한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우리나라는 TPP에서 일본이 민감한 농산물 시장 개방을 요구하고 있고 일본은 우리나라에 소재부품 등 공산품 시장을 열어야 한다고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당국은 이번 일본의 조치를 두고 신중하게 접근하겠다는 입장이다. 정경분리 차원에서 강화하고 있는 경제적 협력이 깨질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정부 관계자는 "대책을 세워나가겠지만 일본과 경제적으로 협력하는 분위기라 외부를 통한 확전을 자제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