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난 성과평가… 펑펑 샌 혈세

수십억대 R&D자금 횡령했는데 집행기관은 "사업 완수"?
장관 표창상 등 수상 업체, 자사 부품 가공비·구입 등 개발비 절반 이상 빼돌려
산기평 등 사후관리 구멍… "R&D자금은 눈먼 돈" 지적


10억원이 넘는 연구개발(R&D) 자금을 횡령한 중소기업의 R&D사업에 대해 돈을 준 5개 정부산하기관 모두 "R&D 사업을 완료했다"며 문제가 없다고 밝혀 정부 R&D 자금 관리에 구멍이 나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14일 법원에 따르면 진공펌프·밸브 제조사 A사 대표 이 모 씨는 정부출연금 22억여원 가운데 12억여원을 다른 데 써놓고 마치 R&D 자금으로 활용한 것처럼 꾸몄다가 적발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산업기술평가관리원 등 5개 정부 산하 R&D 기관으로부터 받은 12억여원을 횡령한 혐의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A사는 지난 2011년 산기평으로부터 '고성능 고분자 전해질 연료전지 금속분리판 생산기술 개발사업' 수행기관으로 선정되면서 총 8억6,670만원의 R&D 연구비를 지원받았다. 이 대표는 이 돈을 관련 R&D에 넣는 대신 협력사에 자사 주력 제품인 진공펌프의 부품 가공 등을 맡기는 등 2011년11월부터 2013년5월까지 4억원 이상을 횡령했다.

A사는 또 2011년 6월 산업기술진흥원으로부터 산업용 대용량 진공 배기시스템 관련 기술개발비 명목으로 정부출연금 3억 5,200만 원을 지원받은 뒤 연구 목적과는 무관하게 진공펌프 부품을 사들이는 데 3억여원을 써 이 역시 횡령했다. 2012~2013년에는 '연료전지용 저가형 금속분리판 양산화 기술 개발' 사업비로 에너지기술평가원으로부터 9억원을 받아 약 4억3,000만원을 다른 데 썼다. A사는 2010년 경북도지사와 지식경제부장관 표창을 받은데 이어 2012년에는 경북테크노파크 선정 '이달의 최우수 기업', 대구경북 첨단 벤처산업 대상(경북도지사상)을 받았던 회사다.

문제는 해당 기관들 모두 A사가 자금 지원을 받은 R&D 사업들을 잘 끝냈다고 밝히고 있는 점이다. 산기평·에기평 등은 "사업 성과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입장을 보였다. 산업기술진흥원 관계자도 "2013년5월 관련 사업이 완료됐고 그해 평가를 받았는데 우수·보통·미흡 등 3개 등급 중 '보통'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는 지원받은 자금 중 절반 이상을 횡령하고 심지어 전액 횡령한 사업이 있는 데도 관련 사업 성과는 완수했다는 것이어서 R&D자금이 '눈먼 돈'이란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건이 이미 관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등 굳이 R&D 자금을 받지 않아도 되는 기업들이 R&D자금을 타서 횡령하고 있는 행태가 만연하고 있다는 방증으로 보는 분위기다. 아울러 R&D사업 성과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 아니냐는 의혹도 증폭되고 있다.

이와함께 관련 기관들은 이같은 횡령이 수년간 지속됐는데도 전혀 이를 감지하지 못해 자금만 줄뿐 사후관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이 확인됐다. 이에대해 산기평 관계자는 "연구비 유용·횡령을 막기 위해 시간 연구비 관리시스템(RCMS)를 도입하고 제재부가금을 의무 부과하는 방식으로 제도를 보완하고 있지만, A사처럼 적법해 보이게 서류를 꾸며 제출하면 적발 자체도 쉽지 않다"며 "현재로서는 제재부가금 부과 수위를 높여 사후처벌을 강화하는 한편 기업들의 윤리의식에 호소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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