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시장 재벌그룹 도산설 난무/지표로만 안정… 마치 “폭풍전야”기아그룹이 부도유예협약 대상으로 지정된지 1주일이 지난 금융시장이 난기류에 휩싸이고 있다.
22일 금융시장에서는 쌍용그룹을 비롯한 대기업의 부도설이 난무, 5대재벌이하의 상당수 재벌그룹들이 부도공포에 떨어야만했다. 금융기관의 집단부실화로 대출창구가 얼어붙어 한계기업들의 자금난이 심화되는 등 금융시장의 불안감이 확산되면서 부도대란의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반면 금리, 환율 등 각종 지표들은 기아쇼크 직후의 급등세가 한풀 꺾이고 있다. 국내 경제사정에 민감하게 반응해온 국제금융시장에서도 아직 구체적인 움직임을 감지하기 어렵다.
기업들의 위기감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채 현실과 동떨어지게 움직이는 금융시장 지표들은 결국 폭풍전야의 고요함을 연상시키고 있다. 전체 자금상황은 별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곳곳에서 모세혈관이 파열돼 실제 자금흐름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기아파문 이전인 지난 14일 연11.24%에 머물렀던 콜금리는 15·16일 양일간 0.35%포인트나 급등했지만 18일이후 연11.57%에서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14일까지만해도 연11.87%수준이던 회사채수익률도 15일이후 매일 0.08%포인트, 0.10%포인트, 0.08%포인트씩 상승곡선을 이어나갔으나 19일이후 안정을 찾아 22일 연12.16%를 유지했다.
반면 기아사태의 여파가 즉각 반영되고 있는 기업어음(CP) 금리는 지난 14일까지 연11.8%대에 머물렀으나 최근 연12.5%대로 뛰어오른 채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기아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실세금리들이 이처럼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는데 대해 금융권 관계자들은 『한보사태이후 계속되고 있는 금융시장의 왜곡현상이 재연되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실제로 대형 부도사건이 터지면 반짝 급등세를 보이던 실세금리는 대개 시간이 지나면서 하향안정세로 돌아서는 양상을 보여왔다. 한계기업의 잇딴 부도로 기업대출을 극도로 꺼리게 된 금융기관들이 운용수단이 마땅치 않아 남아도는 돈을 금융시장에 풀어놓아 실세금리를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양상이 기아파문에서도 재연되고 있다.
이 때문에 금융권 일부에서는 기업들의 자금사정과는 전혀 무관하게 실세금리가 지금보다 더 떨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정작 문제는 금리와 관계없이 긴급자금을 절실히 원하는 기업들에 여전히 돈이 가지 않는다는데 있다. 부도설에 휩싸인 기업치고 되살아난 전례를 보기 어려운 만큼 22일 증시에서 부도설로 홍역을 치렀던 기업들일수록 불안감을 더심각하게 느끼는 상황이다.
상당수 금융기관들이 엄청난 규모의 부실여신을 떠안으면서 자금운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금융기관들이 불안을 느끼기 시작하면 그 여파는 곧 기업들로 파급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대형부도가 잇따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환율이 달러당 9백원대에 진입할 것인지도 초미의 관심사다. 당초 대부분 외환전문가들은 연말에 달러당 8백60원선까지 하락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기아사태라는 돌발변수 앞에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원화절상, 즉 환율하락을 대세로 보고 달러보유규모를 줄여왔던 금융기관이나 기업들이 기아사태이후 외화차입의 어려움을 직감, 달러사들이기에 나서고 있으며 덕분에 지난 15일 달러당 8백91원90전이던 환율이 18일엔 8백94원90전까지 급등했다.
현재는 외환당국의 저지선이 달러당 8백95원에서 형성돼 있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달러당 8백93∼8백94원에서 옆걸음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난 3월말처럼 달러사재기가 기승을 부릴 경우 8백95원선이 무너지며 쉽게 「달러당 9백원시대」로 진입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분위기다. 22일 외환시장에서 한때 쌍용그룹의 자금악화설이 나돌자 순식간에 달러당 2원 가까이 급등했던데서 보듯 환율의 움직임은 예측불허다.
미달러화가 전세계 외환시장에서 강세를 보이면서 달러당 1백16엔대로 반등한 것도 변수로 꼽힌다.
국제금융시장에서 한국물 증권가격이 일제히 하락세로 돌아선 것도 기아사태의 후유증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지난주 런던증시에서 국내 금융기관이나 기업들의 주식예탁증서(DR) 가격이 급락세를 보였다.
또 한보사태이후 삼미, 진로, 대농 등의 잇딴 부도나 부도유예협약 적용 등을 거치며 국내 금융기관들의 해외차입조건이 나빠졌고 기아사태 이후 같은 양상이 되풀이 되고 있다.
그러나 금융기관들이 그동안 자금조달선과 차입조건을 다양화하는 등 나름대로 대응능력을 키워왔기 때문에 기아사태의 후유증은 예상보다 심각하지 않다고 한국은행은 주장하고 있다.<손동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