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때우기 근로 관행 해소·인건비 절감 기대

■ 정부 한국형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도입 추진
불합리한 근무체계에 메스 불구 노동계 반발 무마 등 난제 많아
초과 시간 상관없이 임금 받는 일본식 재량근무제 대안될 수도


# 국내의 한 자동차 업체에 다니는 A대리는 일주일에 평균 3일 이상은 밤 10시를 넘겨 퇴근한다. 이 회사는 사무직 근로자 중 사원과 대리급의 경우 일주일에 연장근로 한도를 12시간으로 못 박고 있다. 주당 12시간 내에서만 연장근로를 한 만큼 수당을 받는 구조이지만 A씨의 근무시간은 이 한도를 넘기기 일쑤다. 물론 한도를 넘은 초과근로수당은 받지 못한다.

#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는 B차장은 A대리와 달리 '포괄임금제'의 적용을 받는다. A 대리는 12시간 한도 안에서 일한 시간만큼 임금을 추가로 지급 받지만 과장급 이상 사무직에 속하는 B차장은 일한 시간에 상관없이 정해진 연장근로수당을 챙겨간다.

정부가 한국형 '화이트칼라 이그젬션(exemption)' 제도를 도입하려는 것은 이 같은 불합리한 근무체계 전반에 메스를 들이대는 대수술이 불가피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A대리와 B차장의 사례에서 보듯 국내 대다수 기업의 사무직 근로자들은 직급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연장근로수당을 받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무직은 실제 근무시간에 비해 훨씬 적은 수당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이면에는 생산직과 달리 사무직은 실제 근로시간을 정확히 계량하기 힘들다는 점, 관리·감독이 쉽지 않다는 점 등이 자리잡고 있다.

특히 현행 제도상 소득이 높은 고위 사무직 근로자까지 초과근로수당 대상에 포함돼 있어 이들 사이에 시간 때우기식 야근이 만연돼 기업에 임금비용 부담을 가중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왔다. 바로 이런 이유로 정부가 일정 수준 이상의 연봉을 받는 사무직들은 연장근로수당을 받지 못하도록 하는 미국의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를 국내 실정에 맞게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게 됐다고 정부 관계자는 설명했다.

◇인건비 절감과 장시간 근로 타파 동시에 노려=정부가 추진하는 제도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고소득 사무직'을 연장근로수당 지급에서 배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근무의 양보다는 질이 중요한 고위관리직들에게 근무시간을 따져 수당을 주는 것은 성과를 높이는 데 아무런 도움이 안 될뿐더러 기업들로서는 과도한 인건비 부담을 계속 떠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부의 인식이다.

이처럼 기업 입장에서는 상당한 비용절감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한국경영자총협회 등의 경제단체는 수년 전부터 마치 '숙원사업'처럼 정부에 이 제도 도입을 건의해왔다. 그러나 정부는 근로자들의 반발을 의식해 미국의 제도를 그대로 도입하기보다는 '하급직 연장근로 엄격 관리'를 일종의 당근책으로 제시하고 있다. 고용노동부의 한 관계자는 "일정 연봉 이하의 하급직들은 현행보다 훨씬 엄격하게 근로시간을 산정해 수당을 지급하게끔 하는 것이 정책추진의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정부는 이 제도가 '업무 효율화를 통한 장시간 근로 관행 해소'와 '기업 인건비 부담 완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정책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노동계 반발 불 보듯 뻔해…실효성 확보도 관건=하지만 이 제도가 실제로 현장에 도입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장벽을 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당장 노동계에서는 이 정책의 핵심 내용인 '고위직의 초과근로수당 지급대상 배제'를 임금삭감으로 간주해 반대의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높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근로자들은 임금삭감은 물론 평등권 침해를 주장하며 반발할 것"이라며 "꼬일 대로 꼬인 노정갈등이 악화되는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실효성 확보도 관건이다. 근로시간 산정 문제만큼은 사무직이 생산직보다 관리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신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 하급직들이 일하는 만큼 수당을 챙겨 받을 수 있으려면 철저한 관리·감독 시스템 마련이 필수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일본식 재량근무제도 거론=일각에서는 지난 2000년대 초부터 일본이 도입해 시행하고 있는 '기획업무형 재량근무제'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견해도 나온다. 이는 일부 화이트칼라 직종에 한해 노사가 사전에 평균 연장근로 시간을 예측해 초과근무 시간에 상관없이 임금을 받는 것으로 한국의 '포괄임금제'와 유사하다.

하지만 국내 제도는 법적 기준이 모호해 노사합의 당시보다 실제로 근무를 더한 근로자가 소송을 내면 근로자의 손을 들어주는 판례가 잇따르는 상황이다. 박 교수는 "재량근무제의 적용 범위를 엄격히 정한 뒤 일본처럼 실제 근무시간과 상관없이 법적으로 노사합의를 인정하는 규정을 만들면 제도의 취지를 살리면서도 분쟁의 소지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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