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 세공업자 출신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랑나르 프리슈(Ragnar Frisch)의 이력이다. 프리슈는 20세기 경제학의 큰 줄기인 계량경제학의 선구자. ‘계량경제학’이라는 용어도 그에게서 나왔다. 1895년 오슬로에서 금은세공업자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가업을 잇기 위한 도제수업을 받으며 자랐다. 보석가공을 배우던 중 ‘대학은 나오는 게 좋겠다’는 어머니의 충고에 따라 20세에 오슬로대학에 들어갔다. ‘쉽고 빨리 끝날 것 같아 선택했다’던 경제학은 그의 인생을 바꿨다. 거의 동시에 마친 대학과 도제수업 사이에서 고민하던 그는 대학 당국이 제안한 영국ㆍ프랑스 3년간 유학을 택해 경제학과 수학을 가다듬었다. 경제이론과 통계학ㆍ수학을 결합한 그의 계량경제학이 이 시기에 싹텄다. 귀국 후 집안의 간청으로 1년간 보석업에 종사했던 그는 결국 대학에 돌아와 강의를 맡고 소비자행동 이론, 무역주기론 등 논문을 발표해 주목을 끌었다. 학문을 꽃 피운 시기는 록펠러재단의 초청으로 미국에 머물던 시절. 통계학자인 어빙 피셔 등을 설득해 1930년 계량경제학회를 세웠다. 귀국 후에는 오슬로대학에 경제학과를 신설하고 1933년에는 학회지 ‘이코노메트리카(Econometrica)’을 창간, 21년간 편집장을 맡아 경기순환과 계량경제학을 접목한 논문과 신조어를 쏟아냈다. 1969년에는 네덜란드의 얀 틴베르헌과 함께 1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로 지명됐다. 은퇴 후 유전학과 경제학을 접목하기 위해 취미로 삼았던 꿀벌 연구에 매진하던 그는 1973년 1월31일 78세를 일기로 사망했지만 아직도 유럽 계량경제학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주로 공직에 진출한 제자들이 통합유럽의 경제정책에 미치는 영향도 날로 커진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