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될 줄 알았다. 지난 90년대 초 에너지로는 우리나라 최초로 국내 석유제품시장의 가격결정을 업계 자율에 맡기고 시장을 경쟁체제로 전환한다고 했을 때 이미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었다. 현 정부 들어 택시요금 조정과 장애인 우대를 위해 사용되던 낮은 가격의 LPG를 승합차의 급증에도 불구하고 계속 사용하게 했을 때도 석유제품 가격조정안이 유종별 특성을 반영하지 않고 모든 석유제품을 같은 가격수준에서 결정, 서로 경쟁하는 방향으로 결정됐을 때에도 이렇게 될 줄 알았다. 그리고 드디어 증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환경부에 따르면 석유제품을 직접 수입해오는 수입 석유사들이 공급하는 석유제품의 품질이 국내 정유사들의 공급품보다도 훨씬 못하다고 한다. SK정유ㆍLG정유ㆍ현대오일뱅크 휘발유의 벤젠 함량이 모두 0.3%를 기록한 반면 수입 업체 휘발유는 0.7%에서 1.1%로 3배 이상의 함량이 검출됐다. 또 국내 업체 휘발유의 황 함량은 11ppm에서 40ppm인 반면 수입사들의 경우는 60ppm에서 119ppm으로 최대 10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경유의 경우도 국내 정유사들의 경우 황 함량이 63ppm에서 188ppm 수준이나 수입사의 경우는 220ppm에서 321ppm으로 최대 5배 이상 차이나고 있다. 또 최근 석유제품수입상이 MTBE를 밀수입, 가짜 휘발유를 제조한 경우도 적발됐다. 수입사의 과다한 가격경쟁 덕택에 우리나라 환경이 나빠지게 된 것이다. 환경부의 한 관계자는 석유제품의 환경기준을 강화하겠다고 관세청은 조사를 확대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과연 그렇게 될지 의문이다. 이미 환경부는 5월 국내 5개 정유사와 석유수입회사들을 대상으로 휘발유와 경유에 포함돼 있는 황과 벤젠 등의 함유량 수치를 공개하고 회사별로 상대평가하기로 했다고 발표했으나 산업자원부는 "우리나라의 자동차연료 환경기준이 선진국 등에 비해 낮은 수준이 아닌데 등급을 매겨 공개하면 무한경쟁을 유발하게 될 것"이라고 반박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경쟁이 문제라면 그러면 애초부터 수입사와 정유사를 경쟁시킨 것도 문제인가. 아니면 높은 환경기준이 문제인가. 산자부도 인정하듯 문제의 본질은 바로 '기준 없는 경쟁'이다. 물론 이때 문제되는 경쟁은 바로 국내 정유사와 석유제품수입사간의 경쟁을 말한다. '경쟁'도 중요한 경제정책 가운데 하나이다. 다시 말하면 정부가 경쟁을 유도할 때는 정책적인 목표가 분명해야 하며 정책시행이 관련산업의 경쟁력향상 및 국가경제에 도움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석유제품가격을 경쟁에 의해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사안과 국내 석유시장에서 수입사와 정유사간에 경쟁하는 것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른 문제이다. 석유제품가격을 자율화해 정유회사간에 가격경쟁을 유도하겠다는 것이나 석유제품에 환경마크를 부착, 석유제품의 환경개선경쟁을 벌이겠다는 정책은 목적이 분명하며 또 그 목적이 달성됐을 때 관련산업의 경쟁력 향상과 우리나라 환경개선에 도움을 줄 것이다. 반면 정유사와 수입사간의 경쟁 확대는 일시적으로 가격하락을 가져왔는지는 모르나 소규모 수입상들의 난립으로 인한 과다한 가격경쟁으로 결국에는 저질 석유제품의 수입과 가짜 휘발유의 수입이라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유회사는 막대한 적자와 과잉 생산설비의 문제로 허덕이고 있으며 석유수입상 역시 과당경쟁으로 문을 닫는 사태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과당경쟁은 우리나라 석유산업의 경쟁력이나 국가경제에 이득을 준다고 하기 어려우며 마땅히 새로운 경쟁제도로 개선돼야 할 것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미국 등 선진국들이 꾸준히 적용하고 있는 이른바 '소비지 정제주의'를 포기한 듯한 인상을 준 지 오래다. 정유산업은 원유정제기술의 특성상 제품별 생산량을 조절하는 것이 매우 힘들다. 따라서 각국에서는 정유산업의 경쟁력 향상 내지 유지를 위해 제품수입상과의 적절한 차별을 유지해왔다. 그리고 이를 '공정경쟁'이라고들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정유사들은 문을 닫고 수입사로 泰씬?전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석유수급사정이 비슷한 타이완은 올해 초 원유관세율을 2.5%에서 무세(無稅)로 전환했다. 물론 그 이유는 자국 석유산업의 경쟁력 제고이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원유관세율 5%는 그간의 석유산업 변화에도 불구하고 20년 이상 변하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최근 조세연구원의 연구에서도 원유관세율을 무관세로 낮춰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다. 산업경쟁력을 고려할 때 매우 적절한 이야기이다. 세금수입감소가 문제라면 원유세를 삭감하는 대신 석유제품에 삭감한 만큼의 세금을 부과하면 될 것이다. 최근에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탄소세나 에너지세 등 제품의 환경수준에 따라 세금을 차등화할 수 있는 제도를 함께 도입한다면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어떠한 경쟁이 관련산업의 경쟁력 및 우리나라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 사려 깊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무한경쟁으로 국내 석유산업 전체의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국내 환경문제를 악화시키는 정책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그보다 원유관세를 낮추고 국내 정유산업의 구조조정을 이른 시간 안에 마무리해 국내 정유산업의 경쟁력을 향상시키는 방안을, 석유수입사들 역시 경쟁력 있고 고품질의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회사만이 남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정유회사와 수입사들도 자기들의 주장만을 펼 것이 아니라 국익과 산업경쟁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경쟁과 규칙'을 정하는 데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허은녕<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지구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자원환경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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