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산책] 무형문화재 이대로 방치할건가


유네스코에서 '올해의 세계 인류무형문화유산'이 발표될 즈음이면 이를 둘러싼 각국의 각축전이 얼마나 뜨거운지 실감한다. 지난해에는 중국과 초미의 신경전을 벌이다 마침내 아리랑이 '인류무형문화유산'대표목록에 올랐다. 그러나 아이로니컬하게도 아리랑은 국내 무형문화재로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김치ㆍ풍물ㆍ제사 등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고유한 문화유산이 국제사회에서 주목을 받는 것과 달리 현 문화재보호법 아래서는 달리 보호할 방책이 없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고 시대적 요청에 맞는 새로운 법과 제도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첨단 과학시대 이끌 창조적 영감 원천

중국은 무형문화 분야에서는 후발 주자이면서도 우리보다 앞서 나가고 있다. 유네스코가 2003년 '무형문화유산 보호협약'을 발표하면서 새로운 개념의 무형문화유산의 범주를 소개했다. 중국은 여기에 발 빠르게 대처하면서 소수민족의 전통문화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조선족의 농악ㆍ아리랑ㆍ회혼례 등을 국가대표목록으로 등재했다. 유네스코가 제시한 무형문화의 개념을 가지고 실천에 옮긴 결과다. 이를 두고 우리가 비난할 계제는 아니다. 오히려 선두주자라는 자부심을 앞세워 국제사회의 움직임과 무형문화가 지닌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우리가 문제다.

현행 문화재보호법은 유ㆍ무형을 막론하고 원형유지가 핵심조항 중 하나다. 1962년에 제정된 이 법은 일제강점기 아래서 무너져버린 전통문화의 복원이 당면과제였고 당시의 절실한 사정은 충분히 이해돼야만 한다. 그러나 반세기가 넘도록 원형을 가진 보유자가 있어야만 문화재가 되는 원칙이 고수되면서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생기고 있다. 또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문화도 보유자가 없다는 이유로 문화재가 될 수 없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무형문화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이 핵심이다. 한국인의 정신적 가치, 고유한 기술, 생활에 근간이 되는 지식과 관습이 아직도 근근이 남아 있는 현장을 볼 때마다 전문가들은 안타까움으로 속이 탄다. 필자가 며칠 전 다녀온 남해의 오실마을에서는 아직도 '두레판'이 벌어진다.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며 사는 이 마을사람들은 예전 방식대로 새 집들이 잔치를 하고 있다.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웃음과 익살로 새 집의 복을 빌어준다. 정읍 입암산 자락 상부마을에서는 조상들의 지혜를 담은 대나무 조리를 누대에 걸쳐 만들다가 이제는 복조리로 생계를 잇고 있다. 혹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글지글 타오르는 불 앞에 서 있는 이 시대의 마지막 대장장이 이옹의 팔뚝에는 정기가 흐른다. 통영시장 한 모퉁이에서 이옹의 솜씨로 제작된 꼬챙이와 갈퀴가 굴 캐는 섬 아낙네 자식들을 대학까지 마치게 했다. 평생 대나무로 통발을 만들다 일흔을 훌쩍 넘긴 김옹은 올 여름 주문량이 4개뿐이라고 아쉬워한다. 내년에는 아예 못 만들지도 모르지만 대나무로 만든 무공해 어구에 대한 자부심은 여전하다. 이런 소중한 전통문화가 언제 사라질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새로운 법을 제정해서 이제까지 보호하지 못했던 무형문화유산을 지켜야 하며 또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둘러싼 복잡다단한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몇 년 전부터 준비를 해온 문화재청에서는 '무형문화유산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안을 만들고 제정을 서둘고 있다. 지난해 한 해 동안 관계전문가들, 전승자(단체)들이 연석한 토론회에서 새로운 제도의 필요성을 거듭 확인한 바 있다.

보존진흥법 제정 등 적극적 정책 필요

최첨단 과학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무형문화유산의 보전을 강조하는 까닭은 이 유산이 자라나는 젊은 세대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내려온 자산을 미래로 잇는 것이 이 시대의 사명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역사와 문화의 깊이가 심원한 곳에서 뛰어난 예술과 기술이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 무형문화유산 진흥을 위한 전담기구를 설립해 신세대들에게 선조들이 닦은 지식과 기술, 예술과 정신을 계발하도록 하는 일도 시급하다는 뜻이다.

유네스코에서는 무형문화유산의 보전을 위해 국제사회가 협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문화다양성의 유지가 인류사회의 영속을 보장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루속히 새로운 법과 제도를 정비해 무형문화유산 보전과 활용의 기본방향을 재설정한 후 국제적인 협력방안도 도모해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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