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애틀시에 살고 있는 미셸 로렌지니(78) 할머니는 편안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젊었을 때 백화점 점원과 전화교환원으로 일했던 그녀는 만 60세부터 매달 1,000달러정도의 연금을 받아왔다. 그러나 지난 98년부터는 매달 2,500달러에 달하는 남편 연금을 대신 받고 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연금액수가 더 큰 쪽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연금이라면 돈을 펑펑 쓰지는 못한다 해도 생활에는 별다른 불편이 없다.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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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평균적인 미국 노인들의 삶은 평온하다. 노후에 필요한 돈이나 의료서비스가 다른 나라에 비해 풍족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원한다면 일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 미국 노인들이 이처럼 평온한 삶을 누릴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노인인구 비중이 크게 높아지면서 공적 연금이 재정위기에 직면해 있는데다 민간 기업연금도 최근 경기부진 여파로 크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촘촘한 사회보장망=미국 노인복지의 근간은 잘 짜여진 사회보장 시스템이다. 그래서 거리에서 구걸하는 노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젊었을 때 이렇다 할 직업이 없었던 노인들에게도 매달 500달러 안팎의 생활보조금이 지급될 정도다.
일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높은 의료보험료 부담에 불만을 품고 있지만 빈곤층이나 노인들은 의료보장제도 혜택을 받는다. 노인들을 위해서는 '메디케어', 빈곤층을 위해서는 '메디케이드'제도가 운영되고 있다.
◇바쁜 노년=돈 걱정이 없으면 몸과 마음도 가벼워지는 법. 자식농사를 다 지어놓은 노인들은 너도나도 사회활동에 뛰어든다. 젊은이들보다 더 바쁘다.
존 밸런(69)씨는 공군사관학교에서 매일 오후 공군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해 준다.
그는 "내 일과는 항상 빈 틈이 없다"고 자랑한다.
미국에서 65세 이상 노인들 가운데 밸런씨와 같은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비중은 60%나 된다. 3명중 2명 꼴이다. 자원봉사는 노인들의 고유 문화처럼 자리잡은 지 이미 오래다.
일하는 노인들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워싱턴 소재 노인복지시설 아이오나 센터의 미셸 멀린스씨는 "65세 이상 인구 가운데 12.8%인 420만명(2000년 현재)이 일자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노인권익 찾기 활발=미국의 노인들이 편안한 노후(사회보장)와 젊음(일)을 누리는 것은 '수요자 중심의 정부정책'과 '노인들의 제 목소리 내기'가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정부는 지난 65년 노인복지법을 제정했다. 67년에는 연령차별 금지법을 만들어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일자리에서 밀려나는 모순의 싹을 잘라버렸다.
여기에는 노인들의 목소리가 크게 작용했다. 노인들은 미국은퇴자협회(AARP)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AARP는 회원수가 무려 3,500만명에 달하는 엄청난 압력단체다. 노인복지를 외면하는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른다. 토마스 오트웰 AARP 언론담당관은 "백악관 노인회의나 노인복지관련 법안은 AARP의 목소리가 생생히 반영된 것"이라고 말한다.
◇연금개혁은 역시 골칫거리=미국이라고 해서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노인인구 급증은 연금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있다. 7,400만명에 달하는 베이비 붐 세대(1946~1964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가 고령인구로 편입되기 시작하면 연금재정은 버틸 재간이 없다.
사회보장재무위원회는 '특별한 조치가 없는 한 연금이 오는 2037년 재정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나마 이런 시나리오에 대비해 세금혜택까지 줘가며 직장인들의 가입을 유도해 온 기업연금(401K)도 위기를 맞고 있다. '엔론 사태'이후 깡통을 찬 근로자들이 속출하면서 안정성과 신뢰도에 큰 흠집이 났기 때문이다. 정부는 사회가 노후를 보장해 주는 기존 연금제도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할 것인 지 아니면 개인별로 돈을 적립하게 할 것인 지 수년째 고민만 하고 있다. 명쾌한 해답이 없어서다. 제아무리 미국이라도 전통적 부과방식(Pay-As-You-Go)의 연금제도만으로는 고령화의 도도한 물결 앞을 이겨낼 길이 없다.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로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할 타산지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