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4년 3월19일(양력 4월25일), 베이징 인근 메이산. 이자성의 반군에 쫓긴 명나라의 17대 황제 숭정제(崇禎帝)가 어린 자식들을 죽이고 자신도 목을 맸다. 향년 33세. 명나라도 건국 276년 만에 명운이 다했다. 숭정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아까운 군주라는 긍정론 이면에는 망국을 자초했다는 혹평이 존재한다. 둘 다 근거가 있다. 숭정제는 재정 건전화, 서구와의 교역을 통한 과학기술 발달에 힘을 쏟았지만 실정도 적지 않았다. 의심이 많아 제위 17년 동안 내각원 50명이 갈리고 형부상서 17명, 총독 7명, 순무 11명이 파직되거나 죽었다. 세금도 갈수록 늘어났다. 가장 비참하게 죽은 중국 황제라는 숭정제는 오랫동안 '멸청복명(滅淸復明)'의 상징으로 꼽혔다. 조선은 중국보다 몇 술 더 떴다. 숭정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일부 유생들은 벼슬도 마다하고 은둔에 들어갔다. 대명(大明)이 사라졌으니 세상과 인연을 끊겠다는 그들은 숭정처사 또는 숭정거사로 불렸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까지도 조선 유생들은 융희 4년이라는 독자연호를 놓아두고 숭정 301년으로 표기할 정도였다. 인조가 당했던 삼전도의 굴욕에도 움직이지 않던 유생들이 숭정제의 죽음에 통곡하던 무렵, 일본에서는 이런 일이 있었다. 일본 주자학의 시조 야마자키 안자이(1618~1682년)은 제자들에게 물었다. '만약 공자를 대장, 맹자를 부장으로 삼는 중국 군대가 일본에 쳐들어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자들이 머뭇거릴 때 야마자키는 명료하게 말했다. '전장에 나가 공자와 맹자를 사로잡아 일본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 이는 공맹의 가르침이다.' 사대주의가 골수를 넘어 영혼까지 박힌 조선은 과거일 뿐일까. 숭정처사의 후손임을 자랑스레 내세우는 사람들은 아직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