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인위적인 엔화 평가절하를 유도하는 일본의 통화정책에 대해 그동안 암묵적으로 지지했던 입장을 바꿔 강력한 경고를 보낸 것은 엔화 약세의 속도가 너무 가팔라 미국 제조업체들의 피해가 예상되고 이를 묵인하면 다른 나라들을 자극해 환율전쟁이 격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4일 일본의 중앙은행(BOJ)이 최근 2년 안에 물가상승률 2%를 달성하기 위해 내년 말까지 본원통화량을 두 배로 늘리고 채권매입 규모도 지금보다 두 배 이상 확대한다는 공격적인 통화완화 정책을 발표한 후 엔화 환율은 12일 달러당 99.94엔까지 치솟아 '1달러=100엔'에 육박할 정도로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다. 아베 신조 정권이 공식 출범한 지난해 12월26일 이후 달러화에 대한 엔화의 평가절하폭은 15%에 달한다.
당초 미국은 15년간의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기 위해 금융완화 및 재정지출 확대를 내건 일본의 '아베노믹스'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해왔다.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올 2월 의회에 출석해 "일본 경제를 디플레이션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아베 신조 총리의 노력을 지지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엔화의 날개 없는 추락이 자동차업계 등 일본과 직접 경쟁하는 미국 기업들에 여파를 줄 것으로 예상되면서 미 재무부도 견제의 필요성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미 자동차업계는 일본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참여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정부에 전달한 상태다. 이런 가운데 엔화 약세가 더욱 심화되면 미국이 주도하는 TPP에 대한 반대여론이 더욱 확산될 공산이 크다는 점도 미 정부로서는 부담이다.
또 일본의 인위적인 엔화 평가절하 정책을 견제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쳐 환율전쟁이 격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해 종전의 신중한 입장에서 벗어나 일본에 직접적인 경고를 한 것으로 분석된다.
경고의 수준도 상당히 높은 편이다. 재무부는 환율 보고서를 통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일본이 자국 통화의 약세를 유도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또 일본이 경쟁적인 환율절하 대신 국내적인 수단을 통해 자국의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국제사회에 한 약속을 지키도록 압력을 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일본 경제의 활력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규제완화와 경쟁촉진에 바탕을 둔 근본적이고 철저한 조치들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는 환율에만 의존하지 말고 개혁을 통해 일본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주문으로 해석된다. 에드윈 트루먼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은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이와 관련해 "(앞으로) 미 정부는 일본 경제 부활을 위한 아베노믹스의 초점이 대외 수출확대가 아니라 국내 경기부양을 통해 이뤄지는지를 지켜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미국 정부의 입장변화로 엔화 약세는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12일(현지시간) 재무부의 보고서가 나온 뒤 엔화 환율은 전일보다 1.6엔 낮은 달러당 98.08엔까지 떨어졌다.
이번주 워싱턴DC에서 열리는 주요20개국(G20) 재무장관회의에서 환율 문제가 주요 이슈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된다. 미 재무부의 환율 보고서는 1년에 두 번(4월15일, 10월15일) 나오지만 2000년 이후 기한 전에 발간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해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회의를 이유로 5월25일에 가서야 나왔다. 이번에 회의가 불과 1주일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일본의 인위적인 엔화 평가절하에 대해 경고를 보내고 한국과 중국에도 환율시장 개입을 자제해야 한다는 내용의 환율 보고서를 발표한 것은 동북아시아 3개국에 대한 환율 압박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반면 급격한 엔화 약세로 큰 피해를 보고 있는 한국과 선진국의 통화완화를 비판해온 신흥국들은 국제공조를 통해 제어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더욱 높일 것으로 관측된다. 일본은 이번 회의를 앞두고 자국의 통화정책이 국제사회의 이해를 얻게 될 것이라고 기대해왔다. 그러나 미국마저 일본의 엔화 평가절하를 경고하고 나선 만큼 국제사회의 이해를 얻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