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31일 오전 국립서울농학교 강당에 마련된 종로구 청운동 제1투표소에서 선거인명부에 서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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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의 참패로 끝난 5ㆍ31 지방선거 후 관심 중 하나가 노무현 대통령의 다음 행보다. 집권 후반부의 국정운영 방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정치적 위기상황에서 특유의 정면돌파로 국면 전환을 꾀했던 노 대통령이기에 더욱 그렇다.
집권 초기 수세에 몰렸을 때 자신에 대한 신임을 묻고자 했고 재보궐선거 후 여소야대 상황에서는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런 흐름에서 여권보다는 주로 야당 쪽에서 노 대통령이 차기 대권을 겨냥한 ‘친노’ 성향의 새로운 정치세력 형성에 중심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열린우리당 탈당에 이은 신당 창당으로 노 대통령이 정계 개편의 진앙지가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청와대는 지방선거 패배 이후 현실정치 개입 가능성에 대해 일축하고 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임기 후반부에 청와대가 정계 개편의 중심에 선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이어 “대통령은 임기 후반기에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동시에 양극화 등 핵심 국정과제에 초점을 맞출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정치권과 거리를 두면서 정책 어젠다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일각에서는 당분간 그동안 견지해온 ‘당ㆍ정 분리’ 원칙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아예 ‘당정 벽 쌓기’ 기조가 형성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노 대통령은 임기 후반기 국정구상의 일단을 지난 2월26일 출입기자와의 산행에서 드러낸 바 있다. 노 대통령은 산행에서 “남은 임기 중 국정의 우선을 양극화 해소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에 두겠다”고 말했다. 청와대 참모들은 이를 두고 탈정치화의 시작이라고 해석했다. 사실 청와대는 연초부터 정치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왔다. 노 대통령은 신년 특별연설과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른바 ‘미래구상’이라는 사회적 어젠다를 제시한 바 있다.
당시 미래구상은 정치권에서 개헌과 정계 개편 등 정치적 행보를 염두에 둔 것 아니냐는 구구한 추측이 나돌았으나 이런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오히려 미래구상 자체가 산적한 정치 현안에 묻혀버린 양상이다. 따라서 연초부터 군불을 땐 미래구상을 재공론화할 가능성이 높다.
미래구상이 지금까지 양극화 해소에만 초점을 뒀다면 앞으로는 잠재성장력을 갉아먹는 고령화ㆍ저출산 문제, 고갈위기에 몰린 국민연금의 개혁 등으로 폭을 넓힐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강력한 국정 추진과 레임덕 방지를 위해 측근의 전진배치형 개각을 단행할 가능성도 예상된다. 현역 의원인 김진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정치권으로 복귀하는 시기가 개각 타이밍이다. 김병준 청와대 정책실장의 교체에 대해 입각을 위한 수순 밟기라는 시각이 강하다.
문제는 여권발 정계 개편이 촉발될 때다. 정계 개편의 빅뱅이 시작되거나 여권이 분열되면 핵심 국정과제를 강력하게 추진해나가기 힘들어지는 탓이다. 당장 올 가을 정기국회에서 민생법안 처리조차 어려워지고 국민연금개혁도 공염불에 그칠 수 있다. 정동영 우리당 의장은 이미 지난 23일 고건 전 총리와 민주당을 아우르는 민주 대연합론을 공개적으로 제기, 선거 후 여권의 빅뱅을 예고했다.
자연히 관심은 여권의 새 판 짜기가 시작될 때 노 대통령이 어떤 입장을 취할지로 모아진다. 노 대통령의 선택으로 우선 탈당을 들 수 있다. 정치권과 확실한 거리를 두고 국정과제에만 매진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새 판을 짜기도 전에 선제적ㆍ능동적 탈당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다양한 성향의 소유자가 이합집산한 우리당의 성격상 노 대통령의 탈당은 곧 여권의 분열을 가속화시키고 레임덕을 자초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탈당 카드는 차기 대선주자 윤곽이 드러날 때까지는 수면 아래에 잠복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헌법 개정, 선거제도 개편 문제 등도 청와대가 먼저 나서 공론화할 입장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 대통령의 정치적 역할이 끝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권의 내홍이 심해지고 원심력이 강해질수록 ‘노심(盧心)’의 향배가 대선 정국이나 정계 개편 등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