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 한니발

천하무적이던 로마군단이 깨졌다. 서기전(BC) 208년 12월22일, 이탈리아 반도 북부 트레비아 강변. 2개 군단 4만명의 로마군이 한니발의 카르타고군과 맞섰다. 알프스 산맥을 넘으며 병력의 절반 이상을 잃은 한니발군과 갈리아 부족 1만명을 합쳐도 3만6,000명. 로마는 승리를 자신했다. 1차전인 티치노 전투는 기병전인 까닭에 졌지만 이번에는 보병전. 자유민으로 구성되는 중장보병대는 로마의 자존심이었다. 결과는 로마의 참패. 1만여명만 목숨을 건졌다. 3만명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한니발군의 전사자는 2,000여명에 불과했다. 로마 원로원은 경악했지만 끝이 아니었다. 트라메시노 호수와 칸나에, 양 전투에서는 10만명을 잃었다. 한니발군은 누더기를 벗고 전리품을 걸쳤다. 로마는 전군에 면도를 지시해 피아를 구분했다. 상류층의 관습이던 면도가 대중화한 게 이 때부터다. 로마는 패할수록 강해졌다. 원로원 의원 전원이 부동산을 국가에 헌납했고 총사령관인 집정관이 선두에서 싸웠다. 15년에 걸친 한니발의 로마원정 동안 전사한 집정관급만도 10명에 달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형이다. 로마는 동맹국에도 관대했다. 병력을 제공받아도 물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셈을 치러 신뢰를 쌓았다. 수도 함락 위기까지 몰렸던 로마는 ‘아프리카누스’스키피오의 등장으로 전세를 역전, 16년에 걸친 한니발 전쟁을 승리로 끝맺었다. 전승의 근간에는 시민의 자유보장과 상류층의 솔선수범이 깔려 있다. 그리스의 의사이자 철학자였던 히포크라테스는 ‘군사적 용기를 좌우하는 것은 제도와 관습’이라고 말했다. 한니발을 자극제로 삼아 로마는 세계의 제국으로 발전한다. 아놀드 토인비가 말한 ‘도전과 응전’의 전형이다. /권홍우ㆍ경제부차장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