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 ‘깨졌다가 다시 붙은’ 도자기가 있다. 작품명은 ‘번역된 도자기’.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설치작가 이수경(47)의 대표작이다. 도공이 가차없이 깨버린 도자기 파편을 가져다 이음새를 맞춘 다음 ‘금이 간 부분을 금(金)으로 채워’ 다시 붙였다. 둥근 항아리의 모습은 잃어버린 대신 뭉게구름 같은 추상적 형상, 부풀어오른 빵 같은 넉넉함을 드러낸다. 사람에 따라 고향의 어머니나 고뇌하는 지식인을 발견하기도 한다. 평론가들은 “추상적이며 현대적인 미감”이라고 극찬했다.
이수경의 개인전이 청담동 마이클슐츠갤러리에서 29일까지 열린다. 2006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이 연작으로 국내외 주목을 받은 작가가 2008년 영국 리버풀비엔날레와 파리 루이뷔통미술관, 지난해 일본 마루가메현대미술관, 올해 독일 베타니엔미술관 등 해외에서 분주하게 활동한 뒤 2년만에 연 국내 개인전이다. 최근 독일 데사우의 오라니엔바움미술관에서 열었던 전시의 연장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고성(古城) 내 미술관에 전통과 현대를 잇는 작가의 작품이 절묘하게 어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적 예술의 원천을 활용한 작품은 전통과 현대의 재조합, 버려진 것들에 대한 재조명, 상처에 대한 치유 등의 의미로 평가된다. 특히 동양 도자에 관심 많은 해외 컬렉터들이 열광한다.
이수경과 도자기의 인연은 2001년 이탈리아 도자축제인 알비솔라비엔날레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미술가의 아이디어를 도예가가 자기로 빚어내는 공동작업 프로젝트를 위해 그는 김상옥이 백자를 예찬한 시 ‘백자부(白磁賦)’를 찾아냈다. 영어로 번역한 시를 다시 이탈리아어로 번역해 도공에게 건네며 “백자를 재현하자”고 요청했다. 서양인 도공이 한시(韓詩)를 읽고 만든 12개의 백자가 첫번째 ‘번역된(translated) 도자기’다.
이후 경기도 이천에서 만난 한 도예가가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자기를 깨뜨리는 것을 본 뒤 그 파편을 얻어와 새 고민을 시작했다. “입체인 도자기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은 평면이 됐고 매화와 나무를 그린 문양은 추상적인 패턴으로 흩어져 있더군요. 이것을 이어붙여 새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건축물처럼 내부에 알루미늄 봉(bar)으로 지지하고 에폭시를 속에 넣어 밀도를 균일하게 했더니 쉽게 깨지지도 않더라고요.” 부활한 작품은 더욱 견고해졌으며 다양한 도자의 미감을 한 몸에 담고 있다. 작가는 “둥근 형태를 선호하지만 의도하는 모양은 없으니 예측 불가능한 형상이 내 작업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서울대 서양화과 출신의 작가는 이 외에도 드로잉과 개념미술 등 다방면으로 재능을 과시한다. 경면주사(鏡面朱沙ㆍ불화와 부적을 그리는 안료인 진사)로 그린 ‘불꽃 드로잉’은 위안과 긍정의 에너지를 전한다. 최근에는 한국의 전통가곡인 정가(正歌)를 동원한 사운드 작업에 심취했다. 먼 훗날 모든 이를 위한 도심 속 명상공간에 관한 작업을 하는 게 꿈이라는 그는 오는 10월 대학로 아르코미술관에서 정가 음악인 정마리 씨와 2인전을 열 예정이다. (02)546-7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