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12월1일] 베버리지 보고서


‘결핍과 질병ㆍ나태ㆍ무지ㆍ불결.’ 베버리지 보고서가 삶의 질 향상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규정한 5대 악(惡)이다. 보고서의 요점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와 상호부조를 통한 궁핍 해소.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요약되는 영국 사회보장제도가 여기서 나왔다. 서구식 복지국가 모델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두 가지 점에서 흥미롭다. 첫째는 1년 반 동안 위원회를 이끈 베버리지(William Beveridge)경의 출신. 골수 보수당원이었음에도 당론과 차이가 많은 사회개혁을 위한 청사진을 만들어냈다. 두번째는 1942년 12월1일이라는 공표시기. 유럽을 휩쓴 나치 독일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런던이 공습으로 두들겨 맞던 시기에 국가의 존망마저 위태롭던 절망적 상황에서도 미래의 희망을 제시한 점이 놀랍다. 베버리지 보고서는 부자들만의 특권이던 ‘빈곤으로부터 경제적 자유’를 영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보장 받는 ‘기본적인 삶(national minimum)’으로 확산시켰다. 가족수당법(1945), 국민보험법(1946), 국민부조법(1947), 아동법(1948)이 잇따라 제정된 것도 보고서의 연장선이다. 세 부담이 늘어난 부유층의 반발이 없지 않았지만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치르며 형성된 국민 전체의 동류의식이 개혁을 성공시켰다. 햇볕이 바람보다 강하다고 했던가. 베버리지 보고서는 서방진영의 안보에도 기여했다. 동구권을 붉게 물들인 공산주의가 서유럽에 확산되지 않은 것은 군비경쟁보다 사회보장제도 덕분이라는 평가도 있다. 대처 집권 이후 지나친 복지정책이 ‘영국병’을 고착화했다며 사회보장 예산을 대폭 줄였음에도 오늘날 영국의 복지 관련 예산은 국내총생산(GDP)의 22.4%에 이른다. 최근 급증했다는 우리나라보다 세 배가량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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