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빌리지 못한다'

임진왜란 개전 초, 대군을 이끌고 동래성 밑에 쇄도한 왜장은 여덟 글자를 쓴 나무판을 내세웠다. "싸울 테면 싸우고 안 싸울 테면 길을 빌리라(戰則戰 不戰 假我道)." 동래성 위에서는 나무판의 여섯 글자로 간결히 답했다.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은 빌리지 못한다(戰死易 假道難)" 전쟁사의 명 장면이다. 동래성을 사수하다 장렬하게 순절한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의 드높은 의기를 보여준다. 이 송상현의 명답 '전사이 가도난'이 지난 달 7?1 개각 때 물러나는 송정호 법무장관의 입에서 나와 이러쿵저러쿵 화제에 올랐었다. 그는 검찰이 대통령 아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와 알력이 생겨 자기가 도중에 하차하게 되었다는 뜻을 비치며 이 말을 인용했었다. 그런데 같은 말을 제목으로 삼은 북한 영화가 남한 텔레비전을 탔다. SBS는 광복절을 맞아 북한영화를 특집으로 방송했다. 북한 조선예술영화소가 인민배우와 공훈배우를 다수 출연시켜 90년대 초.중반에 제작한 임진왜란 소재 3부작이다. 13일 방영한 첫 편 제목은 바로 동래부사 송상현의 명답 '길은 빌리지 못한다'이다.. 영화 도입부는 임진왜란 전야의 '서울' 전경이다. 기와집이 즐비한 조선시대 서울 조감도가 펼쳐진다. 예조성랑 송상현과 무관 리순신이 교우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신분 높은 송상현의 집은 고대광실이지만 하인이 전무한 것이 특징이다. 송상현 부인이 손수 리순신을 접대하는 술상을 차려서 내온다. 양반계급을 부정하는 북한의 영화답게 백성은 있으나 머슴은 나오지 않는다. 어쩌다 '소인들'과 '하인아이'라는 말이 한번씩 나올 뿐이다. 영화는 나라의 첫 대문이 부산 동래임을 강조한다. 선조 유골이 묻힌 이 땅을 왜놈들이 더럽힐까봐 걱정하는 송상현. 이윽고 일본 나고야 항에 '수십만의 침략 무력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고 있다' 장면은 왜장 다이라와 동래부사 송상현이 여덟 글자 대 여섯 글자로 나무 판 대결을 벌이며 절정에 이른다. 이야기 전개는 비분강개 조이지만 서울이 나오고 부산 바닷가가 나오고 해녀가 나오는 것에서 민족의 동질감이 전해진다. 요즈음 제7차 남북장관급회담에 이어 북측 민족예술단이 참가하는 8.15민족통일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강산이 수없이 변해도 혈육의 정은 불변'이라는 북한 예술단 대표의 답사에도 동질감이 배어있다. /안병찬 (경원대 교수)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