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11/22(토) 맑음, 금년 늦가을 최저기온 (영하4도), 바람
북한산 노적봉: 산성입구(10:35) ? 중성문 (11:20) ? 노적사 ? 묘지아래( 11:40) ? 점심(12:50-1315) _ 위문 (13:30) 노적봉 뒷고개 ? 용암문 ? 대동문 (14:50) ? 진달래능선 ? 구천 계곡 - 아카데미 하우스 (16:10)
인원: 5명
생각보다 덜 추운 아침
겨울차림으로 중무장을 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간밤에 불다 지쳤는지 바람이 자는 것 같아 전날 TV와 신문에서 호들갑을 떤 것보다 춥지는 않다. 그래도 아파트 주차장의 세차한 물이 살어름이다.
1시간 여 지하철을 타고 10시 5분전 구파발역을 빠져나오니 겨울차림의 산행객들이 많다. 메마른 분수대에 있으니 김지점장과 눈이 마주쳐진다. 회사 동료들과 북한산에 가는 중이라며 서너명의 일행과 서성인다. 영철이가 노적봉 가이드로 모신 8년 선배님과, 우용이가 나온다. 연용이도 간단한 배낭을 메고 제일 늦게 나타난다. 날씨는 맑다. 바람이 어떨지가 관건이다.
156번 버스를 타고 5분 조금 지나 산성입구다. 10:35. 우리는 길 건너 처음 가보는 조경수들이 즐비한 곳을 따라 올라가다, 계곡을 건너 원효 당집 팻말이 있는 곳으로 해서 원 산행길로 들어섰다. 엊그제 비가 내려 계곡에 흘러내리는 물의 양도 상당하다.
중성문과 풍수설
11:20. 중성문이다. 성문 왼쪽 아래 전에 보였던 산사나무는 빨간 열매를 다 떨어뜨렸다. 다람쥐가 거두어들였는지도 모른다. 중성문(中城門) 현판 왼쪽 아래 작은 글씨로 ``申東泳 高陽市長``이라고 쓰인걸 보면 이 성문 누각(樓閣)이 복원된지 4-5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숙종이 북한산성 축성 이듬해 (1712) 4월 산성을 둘러보고 이 부근이 허약한 것 같아 북쪽으로는 북장대를 지나 원효능선의 영취봉과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의상능선의 증취봉을 연결하는 문을 하나 더 만들게 해 1714년 완성했던 성안의 성의 중심문이다. 적의 침입시 정문인 대서문이 뚫리면 한번 더 저지 할 수 있기도 하다.
조선의 도읍을 북악아래 정하고서 4대문을 지을 때 동대문쪽이 허하다 해서 옹성 하나를 밖으로 붙여 달고, 문패도 흥인과 문 사이에 지(之)자를 넣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청운동에서 홍지문, 상명여대를 지나 향로봉까지 쌓은 탕춘대성도 도성과 북한산성 사이의 서쪽이 허해 보강하기 위한 것이란다. 국민대에서 북악파크 호텔을 연결하는 북악 터널 위가 보토현(補土峴)인데 이 고개가 삼각산에서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허리로 허한 듯 해 흙(土)을 보강(補)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조상의 풍수사상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다.
노승의 염불과 목탁소리
중성문을 지나 앞을 보니 노적봉(露積峰)이 머리위로 우람하다. 노적사쪽으로 방향을 트느라 왼쪽 운하교(雲霞橋)를 건넜다. 여기서부터는 우리 5명밖에는 없다.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오르니 노적봉에 비하면 아주 아담한 산사(山寺)인 노적사다. 대웅전이 정면에 있고 왼쪽 뒤켠에는 나한전(羅漢殿)이다. 석가모니를 주부처로 모시고 있음을 두 현판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노스님의 염불소리와 목탁소리가 주위의 정적을 깨뜨린다. 툭 떨어진 아래에는 새로 지은지 얼마 안되는 전각 한 채가 있었는데 불타 없어졌다고 선배님이 설명해 주신다. 기초를 다지고 있는 모양이다. 불이 났을 때 수호봉인 노적은 마실갔었나…
불타버린 자리를 지나 절을 오른쪽으로 끼고 도니 간단하게 등산로 표시가 있다. 양지 바른 곳에 쉬었다 가잖다. 선배님의 안내로 무덤 아래 넓직한 곳 마람막이 둔덕아래에 배낭을 내려 놓았다. (11: 40) 사철나무처럼 두툼한 잎을 갖고 있는 청미래 덩굴이 간밤 영하의 추위에 시들부들하다. 우용이는 디카로 여기저기를 담아내는라 바쁘고 영철이는 즙이 많은 부사를 깎아댄다. 나도 디카를 꺼내 노적봉 한 컷, 일행 네 명을 봉아래 배경으로 또 한 컷 담아봤다. 사진찍는 것도 여간 부지런해야지 가지고는 다녀도 잘 꺼내지지 않는다. 바람 끝이 차가우니 더욱 그렇다. 묘는 말끔히 다듬어졌는데 비석이 없는 걸 보니 좀 이상하다. 어지간히 시원치 않은 무덤을 빼면 비석은 항상 딸리게 마련인데…
훈련도감유영지
다시 일어나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며 무덤 왼쪽으로 비껴 지나니 한길 넘는 직사면에 원을 그려놓고 그 안에 ``戊``가 또렷이 음각돼 있는 바위가 서 있다. 그런데 도무지 무슨 뜻으로 해 놓은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름 모를 관목의 빨간 열매는 새들의 눈에 띄지 않았나 많이 붙어있다. 왼쪽으로 훈련도감유영지(訓練都監遺營趾)라는 안내판이 서 있고 그 뒤로 밭이 넓게 일구어져 있다. 그 위로 발굴을 해 본 것인지 주춧돌이 4개씩 두 줄로 가지런하고 다른 큰 하나는 따로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때 선조와 인조 두 선왕이 당한 치욕을 두 번 다시는 없도록 하자는 숙종대왕이 삼각산 주능선과 원효능선, 의상능선을 이용해 만든 북한산성. 군이 없을 수야 없지 않은가. 동장대와 북장대를 관할하던 훈련도감의 자리란다.
의상능선의 스산함
낙엽이 쌓인 길 없는 길을 따라 올라 북장대지로 뻗은 능선에 오르니 시야가 넓다. 북장대지 왼쪽으로 보이는 의상능선 시발점인 의상봉이 산성입구에서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 하늘을 찌를 듯 날렵했던 암봉이 뭉툭한 낮은 둔덕으로 보인다. 그 왼쪽으로 툭 튀어 나온 용출봉과의 사이 아래로 자리잡은 국녕사와 좌불이 또렷이 들어온다. 문수봉까지 암봉으로 연결되는 의상능선은 회색빛 나무들로 뒤 덮여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보석 같은 원효능선 암봉들
이와는 대조적으로 북동쪽으로 펼쳐진 원효능선은 한눈으로 제일 가깝게 볼 수 있다. 원효봉, 영취봉, 백운대 뒷면, 노적봉이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하얗게 빛나 눈이 부시다. 하늘 높이 있어 위용도 대단한 노적봉이 1단의 노적가리라면 원효봉은 4-5단의 볏짚으로 만들어진 넓직한 부잣집의 노적가리다. 여기서 내려다보니 상운사가 둥지를 튼 중턱은 절묘한 명당자리로 보인다. 심봉사의 감긴 눈도 저절로 떠질 것 같은 장소다.
6500만년 전 지층을 뚫고 솟아올라온 후 주위의 퇴적층은 침식되면서 단단한 화강암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단다. 그 후 풍화작용으로 조금씩 떨어져 나가고 난 후 돌출해 있는 현재의 북한산의 암봉들. 볼수록 웅장하고 빛을 발한다. 이런 진귀한 보석을 뒤에 두고 사는 축복받은 서울시민들. 저 원효능선만 한번 주파하면 12문이 있는 산성을 한 바퀴 시도해 볼만도 한데 아직은 걸림돌이다. 내년 봄에는 저 보석능선을 밟아 보리라. 의상능선도 회사 선배 따라 금년 이른 봄 처음 가 본 후 3차례나 더 오르내렸는데 원효능선만은 위험하다기에 아직도 범접을 못한 상태다.
노적봉(716m) 정상은 포기
다시 발을 옮겼다. 노적봉(716m)을 오르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바위틈틈으로 흘러나온 물이 얼어있고 고드름이 달린 것을 보니 겁이 난다. 김(철승)사장도 지금은 바위를 타는 게 아니라고 했고, 아까 만난 김지점장도 극구 말렸다. 우리는 노적봉 등산을 포기하고 북쪽 허리로 내려섰다. 낙엽은 수북해 발목 위까지 빠지고 흙은 서릿발이 솟아올라 내려가는 것도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잘못하다 헛디디면 다리 삐기 쉽상이니 말이다.
낙엽지대를 빠져나와 우리는 다시 바위지대로 올라 넓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옆에는 물이 나왔던 모양이다. 샘이 있고 이를 가린 두개의 큰 암석에는 만(卍)자가 각각 새겨진 걸 보면 불자가 전에는 공을 드린 것 같다.
배낭속의 컵라면 3개 든 봉다리 실종돼
다들 점심거리를 꺼낸다. (12:50-13:15) 그런데 이런 낭패가… 내 배낭에 넣어 가지고 온 컵라면 3개가 봉다리채 보이지 않는다. 아까 묘지에서 디카를 꺼내다 빼 놓고 온 것인가? 연용이는 두고두고 써먹을 이야기거리가 하나 생겼단다. 우용이는 따로 컵라면 하나 가져온데다 김밥도 사 가져와 그래도 배는 채웠다. 선배님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국과 매실주도 한 병 가지고 오셨다. 보온병도 하나씩 가져와 컵라면이 있었으며 뜨끈하니 좋았을텐데… 마지막 커피 한 컵씩으로 점심을 마무리했다.
위문(衛門)에 서서 심호흡을
우리는 다시 일어나 원효능선 아래 골짜기를 따라 위문으로 오르는 길로 들어섰다. 백운대에서 수천만년동안 조금씩 살점이 떨어져 굴러 내린 크고 작은 바위와 자갈들이 꽉 차있는 계곡이다. 스틱을 짚은 연용이가 힘든 모양이다. 수직에 가깝다며 발걸음이 느려진다. 그렇지 않아도 올라오며 영철이는 전날 반창 망년회에서 술을 좀 해 힘들다는 얘기였다. 이미 백운대를 올랐던 사람들이 제법 많이 내려온다. 땀을 내 볼 요량으로 넷 일행을 앞질러 숨가쁘게 뛰어 위문에 올라서니 동쪽이 탁 트여있다. 13:30
다시 철계단을 내려와 일행과 합류 쇠밧줄을 해 놓은 만경봉 허리를 따라 걸었다. 이 곳을 처음 지나 백운대를 오르내릴 때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었는데 지금은 여러 번 와 본데다 신발이 처음과는 달라 여느 길이나 다름없다. 끝나는 곳이 노적봉 뒤통수. 전에는 이 앞면은 무엇인가 했는데... 앞과 뒷모습이 전혀 달라 서로 다른 봉으로 착각하기 쉽다. 뒷사면은 회색 나무들이 서 있어 총각 뻘쭉머리 같고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앞의 노적봉은 영락 없이 미남의 믿음직한 얼굴이다.
화려함 다한 단풍나무 군락지
우리는 용암문을 지나 대동문쪽으로 가기로 했다. 여기서 대동문까지는 보국문-대남문 사이와 마찬가지로 단풍나무 군락지라서 산성내에서 단풍이 들면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 설악산 못지 않다. 말라 비틀어진 잎을 달고 있는 것은 모두 단풍나무이니 지금은 잎이 떨어진 다른 나무들과 아주 쉽게 구별된다. 하지만 지고 난 단풍 따라 다니느라 올 가을 이곳의 고운 단풍구경은 하지도 못했다. 신갈나무와 소나무가 조연으로 끼어있다. 왼쪽 암봉 중간쯤에도 등산객이 보인다. 만경봉 남쪽에 있는 용암봉. 여기서 보니 용암봉의 위용 역시 대단하다.
동쪽 용문산까지 시야에
용암문부터는 산성을 따라 걷는다. 동쪽을 바라보니 멀리까지 조망된다. 그렇지 않아도 전날 회사 동료가 바람이 세게 불어 구름을 몰아내 북한산에 가면 조망이 좋을 거라고 했었다. 멀리 구리의 아파트단지, 검단산 아래 하남 아파트 단지, 검단산을 마주하고 있는 팔당대교 건너 예봉산과 운길산, 그 뒤로는 용문산의 스카이라인이 또렷이 눈에 들어온다.
진달래 능선으로
14:50 대동문에서 하산을 서쪽과 동쪽 중 어느 곳을 택할까 하다 동쪽 진달래 능선을 따라 아카데미 하우스로 내려가기로 했다. 들어서자 마자 능선을 버리고 오른쪽 하산길을 택했다. 조금 내려서니 최근에 만들어 놓은 돌 계단이 나온다. 바다에서 파온 돌로 만든 것이란다. 우용이가 중간에 쉬어 남은 물로 커피를 한잔 하잖다. 겨울로 들어가는 길목이다 보니 주위는 아무래도 눈요기 할 게 거의 없다. 구천 계곡을 따라 내려오니 최단 하산코스로 이내 아카데미 하우스 매표소에 이른다. 16:10.
하산주는 빈대떡에 막걸리
마을 버스를 타고 우이지하철역에서 하차 하산주를 위해 시장통 빈대떡집으로 들어 갔다. 16:30. 내내 디카를 눌러댄 우용이가 이메일 주소를 수집한다. 내년 봄에 선배님을 다시 모시고 노적봉을 올라가 보자는 등 잔을 기울이면서 얘기 나누다 보니 1시간 반이 훌쩍 지났다. 막걸리 다섯 병이니까 한명에 한 병 꼴이다. 다들 기분이 좋다.
73년 전 서울 인구 37만 명
나는 선배님과 충무로에서 갈아탔다. 경로석에 선배님이 앉는데 옆에 교수처럼 보이는 분이 옛 지도를 꺼냈다 넣으려 한다. OO일보가 1930년 발행한 한성부 포함 경기도 지도다. 종이는 약간 바랬지만 들어있는 색깔이 선명한 게 요즘 것 같다. 당시의 한성부는 물론 4대문 안이라 조그맣고, 따로 아래 행정구역을 조금 확대 해 놓았다. 그런데 인구와 가구수가 상단에 표시돼 있다. 한성부374,909명, 경기도는 총 1,923,965명. 73년 전의 일이다. 우연히 전철에서 마주친 것이라서 끝자리까지 적어 보았다.
에필로그
혼자였다면 아무래도 추워서 안 갔을지도 모를 산행이었다. 겨울바람에 코끝이 이상해지며 재채기가 자꾸 나오고, 입술은 타고 얼굴이 부석부석하다.
터키에서는 몇일 간격으로 연쇄 자살 폭탄이 터져 수십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수백명에 부상을 입히더니 바그다드에서는 파병 사전 조사차 간 우리 국회의원단이 머물고 있는 호텔에 로켓 포탄이 터졌단다. 국내에는 부안의 핵폐기장 건립 관련 시위가 과격해지고 정당의 불법 정치 자금 조달 수사로 더욱 어수선하다.
<채희묵 chaehmook@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