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에는 디자인산업을 육성하려는 법률과 제도가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또 디자인전공 졸업자 가운데 절반만 디자인업계에 취업하는 데다 이 중 대부분이 그래픽디자이너로 취업하기 때문에 산업디자이너를 육성하는 방안도 필요합니다. 디자인 조기교육을 실시하는 것도 고민해야 할 것 같아요.”
지난 16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한국디자인진흥원의 디자인나눔 행사에서 태국 총리실 직속 태국창의디자인센터(TCDC)의 아피씻 라이스트루글라이 대표가 자국 디자인업계의 숙제라며 기자에게 전한 내용이다. 사내 디자이너만 수천명에 달한다는 삼성전자를 비롯해 굴지의 글로벌기업의 디자이너 육성 전략만 듣고 부러움에 가득 차 건넨 얘기였다. 그러나 주어만 태국에서 한국으로 바꾸면 태국의 디자인업계 모습은 국내와 사실상 전혀 다를 바 없는 내용이다.
여전히 만연한 업계 내 불공정거래와 지적재산권 침해, 디자인산업에 대해 갈수록 떨어지는 정부 차원의 관심, 50%에도 못 미치는 디자인전공자 취업률과 바닥을 헤매는 디자인종사자 처우 수준 등 국내 디자인계 사정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태국보다 크게 우월하지 않다. 오히려 디자인 조기교육 같은 장기 정책은 정부에서 고민조차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런 목적 없이 짓고 있는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를 비롯, 정치인들이 업적 과시를 위한 디자인사업만 전개하면서 천문학적인 세금을 낭비하고 디자인업계만 양분화시키고 있다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게다가 디자인업계에서는 현 정부 들어 디자인산업이 토목ㆍ에너지산업 등에 밀려 관심 밖으로 벗어났다는 불만이 들끓고 있다.
산업 선진국으로서 개발도상국에 디자인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사업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개도국 사람들이 몇몇 글로벌 대기업의 성과에 감탄을 쏟아내는 걸 보고 안도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먼저 정부 차원에서 국내부터 총체적인 선진디자인 육성시스템을 구축한 뒤 이를 개도국에 전수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경제 규모에 맞는 디자인 선진국에 올라서기 위해 정부의 좀더 세밀하고 파격적인 지원과 전략수립이 필요한 시점이다.